캐나다 동부 퀘벡(Quebec)주는 북미의 프랑스 섬 같은 지역이다. 현 주민 대부분은 캐나다에서 태어났지만, 약 80%는 지금도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여긴다. 1980년과 95년 두 차례 분리ㆍ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할 만큼 주권 민족주의 의식이 강하고, 경제 규모나 경쟁력 면에서도 독립의 자신감을 가질 만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캐나다 주 가운데 가장 넓고, 인구도 두 번째로 많다. 주도 몬트리올은 토론토(온타리오) 다음으로 큰 도시다.
16세기 중반 프랑스 식민지로 모피사냥 등을 위한 개척민들이 정착한 게 시작이었다. 1867년 캐나다가 영국령이 된 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이들이 주로 퀘벡에 머물렀다. 영국계가 점점 늘어나고, 경제적 이권과 언어 등 교육, 문화, 외교 이슈가 있을 때마다 양 진영은 대립했다. 퀘벡주 정부는 연방정부와 대체로 불화했고, 대표적인 정치 집단이 프랑스계의 주권을 주장해 온 보수 연합국민당(UPP)이었다. 1936년 주지사가 된 모리스 뒤플레시(Maurice Duplessis, 1890~1959)는 상징적 존재였다. 그는 보수 가톨릭 교회를 정치 기반으로, 혁명 이전의 ‘왕정 프랑스’를 정통으로 여긴 이였다. 풍부한 노동력과 전력, 구리 아연 석면 등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 대전기 퀘벡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교육과 정치, 문화 수준은 별로 진전되지 못했다.
반전의 계기가 된 게 1949년 2월 퀘벡 남동부 석면광 도시 아스베스토스(Asbestos)의 광부 파업이었다. 프랑스 또는 영미합자 회사는 점점 커져갔지만 대다수 프랑스계인 광부의 삶은 열악했다. 노조는 2월 13일, 석면분진 차단 등 노동환경 개선과 노조 보장,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주 정부는 당연히 기업을 편들어 주동자를 수배ㆍ체포했고, 양측의 직간접적 충돌로 다수가 다쳤다.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캐나다 전역의 진보ㆍ자유주의 진영이 퀘벡 광부들을 응원했다. 몬트리올 대주교 등 가톨릭교회 일부도 노동자들을 편들었다.
사태는 6월 양측 합의로 종식됐지만 노동자들이 얻어낸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퀘벡 주민들의 권리의식이 달라졌다. 그 싸움을 주도하거나 응원한 활동가와 언론인들이 대거 정치에 투신했다. 그 변화가 1960년대 퀘벡의 혁신과 교육ㆍ보건 복지를 골자로 한 이른바 ‘조용한 혁명’의 밑천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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