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에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은 고용노동부의 안내 문자였다. 연이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새로운 건강보험증을 보내왔다. 지역 의료보험 가입자로 첫 보험료를 내던 날, 나는 퇴사를 실감하게 되었다.
퇴사를 고민할 때, 나는 정기적인 수입이 중단될 것에 대한 걱정보다 내가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더 컸다. 일하면서 소진을 경험했고, 우울증이 왔고, 심리상담과 운동으로 무기력해진 상태를 전환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며칠 쉬면 회복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시기 나는 청년들의 퇴사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결국 퇴사 연구가 직장에서 마지막 프로젝트가 되었다.
정기적으로 출근할 곳이 없다는 것, 소속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 큰 불안 요소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무얼 먹고 살 거냐”는 질문을 받아도 힘들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요즘 가장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때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편하게 먹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운동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다 보니 해보고 싶은 일이 하나씩 늘었다. 삶에 활력이 생긴 것이다.
나를 돌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방법만 안다고 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충분한’ 휴식과 일터로부터 분리된 시간이 필요했다. 이직할 회사나 계획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 아르바이트와 일의 세계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 사회는 개인에게 좀처럼 쉼과 휴식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몇 달을 쉬기 위해서, 이전보다 더 무리한 노동을 하며 돈을 모아야 하는 모순을 경험하기도 했다. 또 30대 중반이 되어서 경험하는 퇴사는 이전보다 무게감이 달랐다. 재취업을 하더라도 신입 사원으로 받아주는 곳은 없고, 경력직으로 들어가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수와 고용 안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퇴사란 실업 상태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데 사회는 마치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일하는 동안 고용보험료를 냈지만, 비고용 상태에 있는 나를 위한 보험 같은 사회보장제도는 없었다. 같은 시기에 퇴사한 애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약직이었고, 고용보험 가입일이 180일을 넘지 못해 실업급여를 이용하지 못했다. 둘 다 실업 상태에 놓여있는 요즘,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사회보장제도가 아니었다. 서로 저축해놓은 돈을 나눠 쓰거나 곧바로 다시 구직 활동을 해야 했다.
청년 실업에 대한 대책으로 청년수당 혹은 청년구직활동수당이 시행되고 있다. 지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청년수당은 사람들이 시간을 두고 취업을 하거나 진로를 모색하는 데 유용하고 필요한 정책이다. 수당의 가장 큰 효과는 실업 상태에서도 지속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의 청년구직활동수당이나 각 지자체에서 실업 대책으로 내놓은 수당은 대부분 ‘일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거나 ‘일할 조건에 놓인’ 사람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시 노동시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일시적인 대책으로 수당이나 사회보장제도를 상상한다. 그럴 경우, 일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순한 존재로 취급된다.
형식적으로 동일해 보일지라도, 그 제도가 지닌 철학과 배경은 전혀 다른 효과를 일으킨다. 상시적인 실업 상태에 놓여 있더라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의 수준으로 사회적 안전장치를 사회가 제공한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충분한 휴식과 여유를 갖고 쉼을 누리고, 이직을 준비하고, 다른 삶의 전환을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그 자원을 마련해주는 것이 지금 저성장, 비노동 사회로 진입한 이 사회가 사회 구성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이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