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웅 원로신부 인터뷰
5년 전 은퇴한 최선웅(75) 원로신부는 34년 전 고(故)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 “한국 실정에 맞는 피정(가톨릭 신자가 일상에서 벗어나 일정 기간 동안 하는 종교적 수련)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회장이었던 최 신부에게 김 추기경이 운을 띄웠다. 1980년대 한국은 사회 복지의 불모지였다.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정치는 어지러웠다. 빈부격차는 사납게 커졌다. 피정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나누라는 것, 김 추기경의 메시지였다.
1년 뒤인 1986년 최 신부는 장애인, 독거노인, 노숙인, 빈민 등 소외된 이웃을 돕는 피정 프로그램인 ‘나눔의묵상회’를 만들었다. 이전까지 피정의 중심이 가톨릭 신자 개개인의 신앙심을 북돋는 것이었다면, 신앙심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을 목표 삼은 새로운 피정 프로그램이었다. 김 추기경 선종 10주기(16일)를 앞두고 최 원로신부를 서울 강서구 마곡동 자택에서 만났다.
최 원로신부의 회상. 1980년대 그는 ‘어떻게 하면 사제로서 사회에 도움이 될지’를 고민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김 추기경을 만나 물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보통 도와줄까 말까를 고민하게 되지요. 그런 고민 없이, 저절로 호주머니에 손이 가는 나눔을 실천하는 길을 찾아 보면 어떨까요.” 그 한 마디가 최 원로신부의 삶을 바꾸었다.
‘봉사를 통한 나눔’을 앞세운 피정 프로그램이라는 아이디어에 김 추기경은 기뻐했다. ‘나눔의묵상회’라는 이름도, ‘나눔은 사랑입니다’는 피정 표어도 김 추기경이 직접 지었다. “처음엔 ‘스크루지 피정’이라고 불렀어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을 딴 이름이었죠. 개과천선하는 스크루지처럼 피정을 통해 다시 태어나자는 뜻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이 좀 그래서 추기경님과 상의해 ‘나눔의묵상회’로 바꿨어요.”
김 추기경은 나눔의 묵상회의 재원도 마련해 주었다. 천주교서울대교구가 서울 명동 로열호텔에 세를 놨던 주차장(현재 명동성당 내 파밀리아 채플) 운영권을 내 준 것. “임대료가 저렴해 추기경님도 처음엔 큰 재원은 못 될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1980년대 말 자동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수익이 엄청나게 불어났지요(웃음).” 현재는 나눔의묵상회 봉사자들의 자발적인 회비로 운영된다.
김 추기경은 왜 최 원로신부에게 나눔의 소명을 맡겼을까. 최 신부는 1970년대 부제서품 면접 심사장에서 김 추기경을 처음 만났다. 김 추기경의 온화한 표정에 저도 모르게 마음을 털어 놨다. “허리가 굽거나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가는 모습만 보면 찡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김 추기경은 아무 말 없이 끄덕이며 미소만 지었다. “저의 그런 마음을 추기경님이 읽고 간직하고 계셨다가 나눔의묵상회를 맡기신 게 아닌가 합니다. 피정에 참여하는 분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실제로 그 때 그 찡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어요.”
최 원로신부가 기억하는 김 추기경은 근엄하기보단 소탈한 사람이었다. “노인 한 분이 ‘추기경님 저 여기 저기 아파서 더는 못 살겠어요’라고 하셨어요. 추기경님은 ‘정말 죽을 거에요? 정말이요?’ 짓궂게 되물으셨죠. 선물 받은 귀한 양주를 신부들에게 나눠 주시면서 ‘이런 게 나눔이에요’ 하고 농담하신 모습도 생생합니다(웃음).” 최 원로신부가 김 추기경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2003년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였다. “언제 식사 한 번 하시죠.” 최 원로신부의 인사에 김 추기경은 “(아파서) 밥 먹는 게 가장 힘든 걸요”라고 말하며 빙긋 웃었다.
나눔의묵상회는 33년째 이어지고 있다. 매년 분기마다 2박 3일간 진행되는 피정에 지난해까지 4,853명이 참여했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나도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이들이 많다는 건 세상이 그 만큼 각박해지고 나눔이 줄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습관처럼 나눔을 행하고자 했던 추기경님의 뜻을 새기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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