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구금과 고문을 당해 유죄를 받은 뒤 수십년이 지나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됐다면, 재심 무죄 확정판결을 기점으로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 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이 소멸 시효를 넓게 봄에 따라 유신정권이나 제5공화국 때 발생한 각종 조작사건도 국가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넓어지게 됐다.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정모(75)씨와 정씨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고 7일 밝혔다.
5공 때인 1981년 5월, 당시 37세였던 정씨는 서울의 한 버스회사의 안내양 기숙사의 사감을 맡고 있었다. 그는 안내양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북은 하나라도 공평히 나눠 먹기 때문에 빵 걱정은 없다”는 말을 했다가 강제로 연행됐다.
정씨는 영장도 없이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 때의 후유증으로 그는 시력을 거의 잃었고, 난청 장애가 남았다. 정씨는 결국 법원에서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정씨는 2014년 “당시의 수사와 판결이 위법했다”며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발언을 한 사실은 인정되나 이 정도 발언으로 국가존립이 위태로워진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정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손해배상 소송에서 1심과 2심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불법 행위가 발생한 날’로부터 5년 동안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가 소멸된다고 판단했다. 정씨가 2015년 9월에야 소를 제기해 손해배상채권이 이미 소멸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대법원은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정씨가 손해배상 청구를 기대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불법구금이나 고문을 당하고 유죄 확정판결까지 받은 경우, 그것이 불법행위임을 알더라도 실제로는 재심절차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국가배상 책임을 청구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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