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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중국인 신부 도피’ 내막 모르는 공서파, 다산 대신 이가환ㆍ정약전을 공격

입력
2019.02.07 04:40
수정
2019.02.07 13:56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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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도발과 응전

정조실록 1795년 7월 7일자에 실린 박장설의 상소문. 정민 교수 제공
정조실록 1795년 7월 7일자에 실린 박장설의 상소문. 정민 교수 제공

공서파, 다시 포문을 열다

1795년 5월 11일 저녁, 최인길, 윤유일, 지황 세 사람이 붙들려 와서 12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에 고문 끝에 죽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어디에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것은 심문이 아닌 살해에 가까웠다. 중국인 신부의 잠입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천 봉쇄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은폐의 시도는 일단 성공했다.

세 사람이 죽어나갔는데도 그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모를 수 없는데 몰랐다. 그만큼 대처와 뒤처리가 신속했다. 한 달 여 뒤인 6월 18일에 혜경궁의 회갑 잔치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세 사람이 죽고 53일이 지난 7월 4일에야 대사헌 권유(權裕)가 이 납득하기 힘든 3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법관의 수장으로서 법 절차를 무시한 좌의정 채제공의 초법적 행동을 그저 넘길 수 없었다. 분명 뭔가 감추려는 것이 있었다.

권유는 상소문에서 포도대장이 사학을 믿는 세 남자를 타살했고, 그는 채제공의 지휘를 받았는데, 한 밤 중에 아무도 모르게 서둘러 죽여 마치 단서가 탄로날까 봐 입을 막고 자취를 지우려는 것처럼 했으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포문을 열었다. 실상을 공개하고, 포도대장을 붙잡아 죄를 묻는 한편, 사학에 대한 규찰을 강화할 것을 요청했다.

뜨끔해진 정조는 권유의 글에 대신인 채제공을 은연중 겨냥한 뜻이 있다고 나무라며, 법에 따라 처단해 서학을 믿는 다른 자들을 징계하고 훗날을 경계토록 하자는 것 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고 선제했다. 막판에 문서를 이송(移送)하지 못한 잘못과, 이들이 너무 일찍 죽어 실상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은 유감으로 인정하되, 이밖에 다른 은폐의 시도는 있을 수 없다고 말허리를 잘랐다.

박장설의 직격탄

사흘 뒤인 7월 7일, 행부사직(行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기다렸다는 듯이 상소를 올려 불씨를 살렸다. 하지만 그는 상소에서 천주학의 배후로 이가환을 저격했다. “아! 저 이가환은 단지 일개 비루하고 음험하고 사특한 무리입니다. 얄팍한 글재주로 기림이 있어 한 세상을 속여 도적질하였으니, 의리가 어지럽고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에 대한 단안(斷案)입니다. 사학(邪學)을 앞장서서 주도하여 우리 유가의 도와 배치되니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큰 죄입니다.”

잠입한 중국 신부에 대한 한영익의 신고로 시작된 사건에서 중국 신부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박장설이 세 사람이 죽은 사실만 알고, 사건의 내막은 전혀 몰랐다는 뜻이다. 박장설은 한발 더 나가, 이가환이 어리석은 조카 이승훈에게 요서(妖書)를 사오게 해서 스스로 교주가 되었다고도 하고, 남의 자식을 해치고, 제사를 끊어버리게 한 장본인이라고까지 매도했다.

그의 상소는 다시 이렇게 이어졌다. “연전에 성상께서 내리신 역상(曆象)에 대한 책문(策問)에서 이가환은 감히 청몽기(淸濛氣) 등의 불경스런 주장을 신법(新法)이라 하면서 방자하게 지어 올렸습니다. 시험을 주관할 때 책문의 제목을 오행(五行)으로 내자, 장원으로 급제한 자의 대답이 서양 사람의 학설을 위주로 해서 오행을 바꿔 사행(四行)으로 한 것이었는데 바로 그의 도제(徒弟)였습니다.”

이 시험에서 1등한 답안지는 바로 다산의 형인 정약전의 것이었다. 이가환이 자신의 도제인 정약전이 서양인의 학설을 주장했는데도 장원으로 뽑았고, 그 자신 또한 서양인이 주장한 청몽기에 관한 주장을 임금께 올린 책문에서 거리낌 없이 썼다는 것이었다. 이것만 봐도 이가환과 정약전이 모두 천주교도임이 틀림없고, 갑작스레 죽은 세 사람의 배후임이 분명하니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청몽기와 사행에 대해서는 지난 13회에서 언급한 바 있어 이 글에서는 자세히 논하지 않는다.

정조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도피 내막을 전혀 모른 채 엉뚱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은 박장설의 상소문을 읽고 ‘해괴하고 앞뒤 없는 글’이라며 분노했다. 그림은 이길범 화백이 1989년 그린 정조 표준영정.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정조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도피 내막을 전혀 모른 채 엉뚱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은 박장설의 상소문을 읽고 ‘해괴하고 앞뒤 없는 글’이라며 분노했다. 그림은 이길범 화백이 1989년 그린 정조 표준영정.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해괴하고 앞뒤 없는 글

정조는 박장설의 상소문을 읽고 격노했다. 박장설은 실상을 전혀 모른 채 엉뚱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분노의 수위를 더 끌어올렸다. 박장설은 세 사람의 죽음이 천주교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는 막연한 확신 아래, 그 칼끝을 엉뚱하게 이가환과 정약전에다 겨눈 것이다. 쿡 찔러 반응을 떠보자는 의도였다. 박장설이 휘두른 것은 목표를 잃은 눈 먼 칼이었다.

상소문에서 박장설은 스스로를 ‘기려지신(羈旅之臣)’으로 일컬었다. 타향을 전전하며 떠도는 신하란 의미다. 정조가 노기를 띠며 말했다. “나라의 기강이 아무리 엉망이라 해도 어떻게 신하된 자가 이렇게 해괴하고 앞뒤 없는 글을 올리는가?” 그러고 나서 기려지신이란 표현이 어찌 나라 안의 벼슬아치 입에서 나올 수 있느냐면서, 그 말 그대로 해줄 것을 명했다. 박장설은 두만강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도착 즉시 동래로 옮기게 한 뒤, 다시 제주로 보내고, 바로 압록강까지 다시 끌어 올리는 최악의 유배형에 처해졌다. 계속 떠돌다가 길에서 죽으라는 얘기나 같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정조는 박장설이 문제 삼은 정약전의 답안지를 가져오게 해 그 내용을 꼼꼼히 오래 검토했다. “답안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글에는 박장설의 얘기와 달리 애초에 의심할만한 거리조차 없었다. 역법 또한 계속 도수의 차이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서양의 역법은 예전부터 익히 보아온 것인데 이것을 어찌 문제 삼는가? 더구나 역법이 서교와 무슨 상관인가?” 임금은 두 차례로 나눠 전교를 내리면서까지 이가환과 정약전에 대한 비난을 차단하고, 박장설이 예전 홍낙안이 그랬던 것처럼 기회를 틈타 돌을 던지는 짓을 하고 있다고 몰아 붙였다.

정조가 박장설의 상소에 대해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무엇보다 박장설의 글이 사건의 진실을 모른 채 썼기 때문이었다. 틈만 나면 엉뚱한 사람을 때려잡으려고 돌팔매질을 하는 악질적인 행태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실제 이 사건에서 타깃이 되어야 마땅한 사람은 주문모 신부의 피신을 도운 다산이었다. 그 같은 사정을 꿈에도 몰랐던 박장설의 칼끝이 엉뚱하게 이가환과 정약전을 겨누었다. 공론화를 목적으로 던진 회심의 카드는 결국 자신들의 무지와 허점만 노출시킨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박장설은 앞서 이기경이 초토신 상소를 올렸을 때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것도 상소냐?

박장설의 상소문을 두고 ‘사암연보’는 그가 목만중의 사주를 받아서 썼다고 했다. 박장설이 상소문에서 비방한 내용은 목만중이 평소 입만 열면 말하던 것이었다. 같은 날인 7월 7일, 임금의 전교를 본 지평(持平) 신귀조(申龜朝)가 사학을 금지시킬 것과 주요 증인을 죽인 포도대장을 처벌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상소문에서 신귀조는 박장설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전교가 말이 너무 많아서 마치 변명하는 느낌까지 들어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정조는 이것도 상소냐며 벌컥 화를 냈다. 값비싼 종이에 아무 근거도 없는 말만 늘어놓았으니 조정을 욕되게 하고 대각의 체통을 무너뜨리는 짓이라며, 상소를 접수하지 말고 되돌려 주고 그마저 직위에서 쫓아내게 했다. 앞으로 이 같은 상소문을 올리려는 자들이 연영문(延英門)이나 금호문(金虎門)에 얼씬하기만 하면 해당 부서의 승지와 당상(堂上)까지 유배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가환의 천주교 신앙 문제는 다산이 ‘정헌묘지명’에서 워낙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천주교 문제가 불거지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이 이가환이었고, 그 다음은 다산이었다.

이재기가 쓴 ‘눌암기략’에 나오는 다음 일화가 흥미롭다. 승선(承宣) 임제원(林濟遠)이 농담을 잘했다. 한번은 이가환과 승정원에서 함께 숙직을 했다. 하루는 이가환의 집안사람이 숙직하는 곳으로 제사 음식을 보내왔다. 임제원이 말했다. “자네 집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천주교 신자가 어찌 제사를 지내느냐고 뼈있는 농담을 던진 것이다. 평소 이가환과 천주교 신앙을 연결지어 바라보던 시선을 볼 수 있다.

또 ‘눌암기략’에 당시 박장설의 모함을 받았던 정약전의 반응을 보여주는 일화도 보인다. 목조영(睦祖永)이 정약전을 집으로 찾아갔다. 정약전이 격앙되어 목조영을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목씨 성을 가진 자가 기사년(1749)에 한번 거꾸러지고, 경술년(1730)에 한번 쪼그라들었는데도 다행히 남은 종자가 있었다. 이제 목만중이 또 선비들을 죽이려고 하는가? 이후로 목만중으로 하여금 현헌(玄軒) 목세평(睦世枰)의 사당에 들어가 절하게 해서는 안 된다.” 평소의 정약전 답지 않은 앙칼진 말이었다.

1749년 목조영의 조부 목래선(睦來善)이 죄를 입어 귀양 간 일과, 1730년 목천성(睦天成) 형제가 죄를 입고 죽은 일 등 목씨 집안의 묵은 잘못을 들먹이며, 그런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선비들을 죽이려 드는 목만중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정약전의 말은 목만중은 사람도 아니니, 그와 계속 한 집안으로 지낸다면 너까지도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날 목천성은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봉변을 당했다.

채제공의 응전

채제공도 더 이상은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권유와 박장설, 신귀조의 상소문이 모두 세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의 책임을 자신에게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제공은 이튿날인 7월 8일에 차자(箚子)를 올렸다.

간추린 뜻은 이렇다. “대사헌 권유의 상소가 내게 불순한 의도가 있는 듯이 말했지만, 이들 셋이 고문 도중에 죽어버린 것은 나 또한 분통하게 여긴다. 사람들이 의심하나 사건의 이면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이 문제를 확대하지 않고 덮은 것은 흉흉한 시대에 사학 금지 조처가 내리면 서로 모함해서 끌고 들어가 마침내 어떤 상황에 이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대사헌의 말대로 사학을 발본색원하더라도 서로 모함해 죽이는 말류의 폐단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간절한 마음이 담겼고, 아량과 공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훌륭하고 적절한 조처다’라며 화답했다. 하지만 이런 문답이 오가는 사이에 천주교 문제는 저들의 의도대로 서서히 공론화의 자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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