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ㆍ세계화)은 가고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sation)이 왔다.’
1990년대 이래 전성기를 구가했던 세계화 추세가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전세계를 하나로 묶었던 상품 교역이 지역 단위로 파편화되고 국경을 넘나들던 자본 이동이 위축되면서 글로벌 경제의 통합 속도가 느려지는(slow)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4일 이 같은 내용의 특집기사를 보도하면서 이같은 추세 변화는 세계화 시대와는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줄줄이 후퇴하는 세계화 지표
기사에 따르면 금융위기 무렵부터 지난해까지 교역, 자본 회전, 투자ㆍ대출, 인력ㆍ정보 교류 등 12개 세계화 연관 지표의 변화를 분석한 결과 8개에서 세계화 수준 후퇴가 감지됐다. 재화ㆍ서비스 교역량은 2008년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의 61%를 차지했지만 지난해 58%로 떨어졌고, 중개무역량 또한 같은 기간 19%에서 17%로 낮아졌다.
국가간 은행대출은 2006년 전세계 GDP 대비 60%에서 지난해 36%로, 해외직접투자는 2007년 GDP 대비 3.5%에서 지난해 1.3%로 위축됐다. 다국적기업의 이익이 전체 기업 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08년 33%에서 지난해 31%로 하락했다. 전세계 국가의 국민 1인당 평균 구매력은 2008년 미국 국민의 88%였지만 지난해엔 50%로 급락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네덜란드의 경제동향분석가 아지드 바카스의 용어를 빌려 세계화의 둔화 양상을 ‘슬로벌라이제이션’으로 명명했다.
금융 부문에선 2008년 금융위기가 추세 변화의 결정적 계기였다. 위기 이후 글로벌 차원의 자금 흐름이 위축되고 해외투자 평균 수익률도 2005~2007년 10%에서 2017년 6%로 떨어지자 금융기관들은 내수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실물경제도 세계화의 한계에 봉착했다. 서비스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나라별로 법률, 면허 등 제도가 다르다 보니 제조 상품만큼 해외 진출이 용이하지 않은 탓이다. 제조업 역시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자급 능력이 강화되면서 교역 필요성이 줄어들고 있다.
◇분열하는 세계, 우려도 크다
슬로벌라이제이션은 경제 교류 범위를 인근 지역으로 좁히는 ‘블록화’로 현실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주도로 결성된 미국ㆍ멕시코ㆍ캐나다 무역협정(USMCA),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이 비근한 사례다.
금융시장도 다르지 않아서, 유럽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계기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던 파생상품 시장 육성을 꾀하고 있고 중국은 아시아의 경제블록화를 염두에 두고 채권시장을 적극 키우고 있다. 관세 인상을 앞세운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전략은 세계경제의 블록화 경향을 더욱 강화할 전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러한 흐름이 당장은 세계화의 부작용을 해소할 것처럼 보여도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긴장을 초래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달러화 중심으로 구축된 글로벌 금융시장이 균열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지 않고, 미국 중국 유럽 중심의 역내 무역이 강화되면 아프리카, 남미 등 나머지 소외 지역의 경제 악화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ㆍ탈세ㆍ사이버범죄 등 국제공조가 필수적인 문제가 방치될 가능성도 크다.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 유럽연합(EU)이 역내 경제 참여국의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정치적 분란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놨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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