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명절사용설명서
과도한 음식 준비에 여성들 스트레스
취업ㆍ결혼 걱정은 상처만 주기 십상
노년ㆍ젊은층 세대간 이해 노력 있어야
기다려지는 명절 문화 만들기 가능해
민족 대명절 설이 돌아왔다.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친지들과 덕담을 주고받는 풍경이 떠올라야 할 즐거운 날.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벌써부터 명절 증후군 증상을 느낀다. 우리의 명절은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닐까. 명절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명절 후에는 이혼 부부가 급증한다는 통계는 ‘명절이란 무엇인가’라는 무거운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지난해 명절 직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접수된 하루 동안 이혼상담 건수는 설 이후 22건, 추석 이후 22.7건으로, 하루 평균 상담건수(18.8건)를 크게 웃돈다. 속이 답답하고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병’ 환자 수도 명절 전후에 가장 많이 는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건의료빅데이터개방시스템에 따르면 2017년 7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1년 간 화병 증상으로 한방병원을 찾은 2만6,143명 중 추석 전후인 9월 한달 동안 화병 진단을 받은 환자수가 2,451명에 달해 월간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사노동을 ‘여성이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상처 주는 잔소리를 “다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며 무심코 뱉었다가는 명절 풍경이 지옥으로 바뀔 수 있다. 시대는 바뀌는데 명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화 레퍼토리가 진부하다면? 이번 설 연휴에는 가족ㆍ관계 전문가들이 제시한 ‘명절사용설명서’를 성실히 따라 슬기롭게 보내는 건 어떨까.
◇‘상다리 휘어질라’ 음식 조금만 하기
장한철(25)씨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친가 외가를 오가며 하루에 밥만 대여섯 번 먹었는데, 지금은 명절 문화를 간소화했다”고 말했다. “우리 세대가 나중에 명절을 편하게 보낼 수 있도록 어머니께서 총대를 메셨어요. 고향이 제주도인데 생업이 있으니 내려가기 힘들 때가 많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대표로 내려가서 차례를 지내고 오세요. 명절 과도기인 셈이죠. 문화를 바꾸고 나니 명절을 더 즐겁게 떠올리게 됐어요.”
“아무도 안 먹는 음식 죽어라 차리지 말자”는 다짐을 실천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명절에 살찌지 않는 법’이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전파되는 모순적인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에야 익힌 식 재료에 달걀 옷을 입히고 다시 튀겨 명절만큼은 기름지고 배불리 지내려 했다지만, 바야흐로 성인병을 걱정하는 시대다. 명절상을 받는 어르신은 물론 20대 청춘까지 각종 전과 부침이 몸에 이로울 이는 없다.
차례상도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조상이 좋아하는 음식을 가문의 전통에 맞게 차리면 된다. 국 한 그릇이라도 맛있게 올리는 게 중요하다. 홍동백서(紅東白西)에 집중하느라 노동을 넘어 사역할 필요는 없다. 관습적으로 따르는 어동육서(魚東肉西), 좌포우혜(左脯右醯), 홍동백서, 두동미서(頭東尾西)는 사실 유교 예서 어디를 봐도 나오지 않는다(본보 2018년 9월 22일자 1면). 차례의 본질은 새로운 곡식이나 과일이 나오면 그걸 조금 올려 조상에게 인사한다는 의미다.
◇가족 간에도 필요한 ‘대화의 기술’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 사이에 못 할 이야기가 있을까? 최새은 한국교원대 가정교육과 교수는 “나를 아끼는 가족과의 대화에서 피해야 하는 대화 소재는 없다”고 단언한다. 대신 단서가 붙는다.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일 때에만. “가족이라고 모두 정서적으로 가까운 건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2~3가지도 선뜻 말하지 못하면 ‘잘 안다’고 할 수 없어요.” 누구에게나 중요한 성적이나 진로, 연애, 결혼, 자녀계획, 직장 문제를 물어볼 땐 조언만 하지 말고 먼저 충분히 들어주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대화의 기술이 부족하다면 민감한 소재를 피하는 것이 낫다. 아이들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성적 비교, ‘다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취업과 결혼에 대한 압박, 자녀계획 등에 대한 선을 넘은 참견 등 화기애애해야 마땅한 명절 분위기를 가시방석으로 만든다. 오수향 SHO오수향대화심리연구소 소장은 “진심 어린 걱정과 관심도 당사자를 지치게 한다면 잔소리에 불과하고,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다”라며 “개개인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소재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대신 서로의 관심사를 묻고 응원하는 말을 건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는 “무심코 툭 던진 개인적인 질문이나 비교하는 말, 조언, 자랑은 각자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앞날을 계획하며 힘쓰는 당사자들을 지치게 할 수 있다”라며 “대신 관심사에 대해 묻고 내가 하고 싶은 말 대신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면 큰 명절 선물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시골 근처를 여행하자
모처럼 함께 모인 가족들과 의미와 재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적지 않다. ‘귀성 전쟁’을 치러가며 힘겹게 시골에 가도 가족 얼굴만 보고 오면 가까이에 있는 마을 주변 명소조차 모르는 일이 많다. 임영주 부모교육연구소 대표는 “가족과 함께 지역 명소를 다녀오면 어른들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아이들은 색다른 추억을 쌓을 수 있다”라면서 “이야깃거리도 생기니 불필요한 대화 소재를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같은 지역문화를 공유하니 공통의 관심사가 생긴다는 장점도 있다. 황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유적지는 명절에도 문을 여는 곳이 많다”라며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연스럽게 선조와 지금의 가족, 그리고 자식들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고 말했다.
오수향 소장도 야외활동이나 문화생활을 통해 재미를 찾으라고 조언했다. “연휴 내 집에만 머물면 부딪히고 스트레스가 쌓여요. 윷놀이나 제기차기, 비석치기 등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전통놀이는 가족 간 친목을 다지기에 좋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거나 고궁, 공원 산책을 해보세요.”
◇젊은 세대 의식 배우세요
세대 간 인식 차는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만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가 서로 다른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적어도 사소한 충돌은 피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을 들려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라”는 조던 피터슨(토론토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의 법칙은 가족 간 대화를 매끄럽게 만드는 효과적인 비법이다.
“어르신들이 흔히 하는 말씀 중 세대가 바뀌어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그러려니 받아들여도 젊은 세대는 ‘다른 세상 이야기’로 생각하고 귀를 닫게 되지요. 젊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배우면 대화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세대 간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분위기를 보다 화목하게 만들더라는 황명진 교수의 경험담이다. 그는 “어르신들이 칭찬이라고 몸매를 평가하거나 남자들이 좋아하겠다는 식의 말을 하면 명절 분위기를 망칠까 봐 싫은 기색을 하기 쉽지 않다”라면서 “(외모나 몸매품평은) 옛날에도 점잖은 말이 아니었을 뿐 더러 요즘 젊은 사람들은 더욱 민감하다는 것을 어른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영주 부모교육연구소 대표도 “어르신들이 대화를 주도하는 대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어떤 게 화제인지 먼저 물어보면 존중받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기다려지는 명절 문화 만들기
연휴가 끝나면 “명절 증후군을 피하려 자진해서 당직근무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고향을 떠올릴 때 ‘하루 종일 전 부치기’나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떠오른다면 귀성길을 앞에 두고 한숨이 쏟아진다. 전문가들은 자녀들이 고향을 찾는 반가움을 느낄 수 있게 하려면 “왜 안 내려오느냐”고 채근하기 전에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분들’이라는 편안한 느낌을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업가 지준기(60)씨는 “자식들과 멀어진다”고 푸념하는 친구들에게 “안 온다고 서운한 소리만 하지 말고, 오도록 유도하라”고 조언한다.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뜯어주고 올 때마다 차비도 챙겨주니 아들 부부가 먼저 찾아온다는 것이다. 반년 전 출산한 며느리를 배려해 이번 설에는 “친정에서 지내라”고 일찌감치 언질 해뒀다. “아기 보느라 힘든데 무리해서 오라고 할 필요 있나요. 이번 명절은 친정에서 지내고 여건 될 때 들르라고 했습니다. 손주 보고 싶은 마음은 사돈도 마찬가지잖아요.”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부모님이 연로하시다면 내년 설에도 뵐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이번 명절은 가족을 볼 수 있는 ‘보너스’가 될 수 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회한이 남지 않게 서로를 대하라”는 가르침은 부모와의 이별을 먼저 겪은 어른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교훈이다.
성묘를 갈 때나 차례를 지낸 뒤 자연스럽게 죽음에 관한 대화를 하는 것도 좋다. “부모님이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시는지 보고 헤어짐을 염두에 두는 일은 중년세대에게 중요하다”고 황 교수는 말한다. “어르신들 눈초리에는 내년을 기약할 수 없다는 애처로움이 묻어납니다. 잔소리로 들리는 이야기들은 그런 조바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우리 누구도 내년을 기약할 수 없어요. 올해도 뵐 수 있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고향을 찾으세요.”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김수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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