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강자에 분노하고, 약자를 품은 ‘위안부 투쟁의 상징’ 김복동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강자에 분노하고, 약자를 품은 ‘위안부 투쟁의 상징’ 김복동

입력
2019.01.29 18:04
수정
2019.01.29 23:34
2면
0 0

92년부터 국제사회에 증언 앞장, 위안부 피해자서 여성인권운동가로

전시성폭력 피해자 ‘나비기금’ 설립… “전재산 기부, 통장엔 160만원”

[H2015062400563] 29일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석한 모습. 심현철 코리아타임스 기자 /2018-12-05(DB콘텐츠부)
[H2015062400563] 29일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석한 모습. 심현철 코리아타임스 기자 /2018-12-05(DB콘텐츠부)

평생을 일본과 싸워온 할머니는 끝내 일본의 사죄를 듣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 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윤미향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대표는 “임종하시던 날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사력을 다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 대신 싸워 달라’고 당부했다”면서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할머니는 기력이 다 하는 순간에도 일본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가까운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분노를 표시했다고 한다.

28일 별세한 김복동(93)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투쟁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4살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위안부로 연행됐다.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 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은 할머니가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것은 해방 이후인 1947년, 21살이 되던 해였다.

평생을 가슴에 묻어두었던 응어리가 터진 것은 1992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할머니는 일본의 만행을 공개했다. 같은 해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의 증언을 시작으로 93년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석, 일본군에게 겪은 세세한 폭력들을 증언했다. 할머니의 용기는 피해국인 한국에서도 쉬쉬하던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할머니의 활동은 위안부 피해 구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전쟁의 무참함에 무너지는 여성과 아동이나 심각한 재난의 피해자 등 전세계 약자들로 시선을 돌리는 데는 자신의 경험이 토대가 됐다. 2012년 정의연의 전신인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과 함께 전시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나비기금’을 설립하는가 하면 2014년에는 거꾸로 한국군이 가해자였던 베트남 전쟁 당시 성폭력 피해자에게 사죄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국경을 넘어서는 할머니의 인권활동에 2012년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의회는 용감한 여성상을 수여했고 국경없는기자회는 2015년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으로 선정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2015년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김 할머니는 그렇게 ‘위안부 피해자’에서 ‘평화인권운동가’로 발돋움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종로구 외교통상부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저작권 한국일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종로구 외교통상부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성과 인권을 위한 할머니의 왕성한 활동은 고령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모습을 드러내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 2017년 대장암 판정을 받고 여러 차례 수술까지 받은 김 할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도 멈추지 않았다. 포항 지진 피해자와 우간다와 콩고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피해자,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2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하는 등 나눔에 인색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윤미향 정의연 대표에 따르면 할머니가 남긴 통장에 남은 돈은 160만원에 불과했다.

할머니가 평생을 좇은 것은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 하나였다. 비가 세차게 쏟아진 지난해 9월 복강경 수술을 받은 몸을 휠체어에 의지해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는 1인 릴레이 시위에 참석한 것도 오직 하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사죄 한 마디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윤미향 대표는 “2015년 아베 총리가 망언을 할 때도 할머니는 온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여러분, 세계에 나비가 날고 있어요. 이 늙은 나비도 날고 다닙니다’라고 하셨다”며 “진정한 평화 속에 할머니가 훨훨 날 수 있도록 그 뜻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식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한다”는 고인의 생전 뜻에 따라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시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는 29일 오전 11시부터 조문이 시작됐다. 발인은 2월 1일 예정이다.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가 마련됐다. 서재훈 기자/2019-01-29(한국일보)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가 마련됐다. 서재훈 기자/2019-01-29(한국일보)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제보를 기다립니다

안녕하세요 제보해주세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