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피해자임을 공개… 93년 세계에 증언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 김 할머니 결국 하늘로
“아베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라.”
만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게 끌려가 인생을 유린당한 김복동(93)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린 상징적인 인물이다. 90세를 넘긴 고령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정부에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했지만 끝내 그 답을 듣지는 못하고 28일 오후 10시 41분 눈을 감았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윤미향 대표는 “할머니께서 마지막 순간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워낙 기력이 없으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유일하게 알아들은 말은 ‘일본에 대한 분노’ 한 마디였다”고 언론에 전했다.
김 할머니는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4세이던 1940년 일본군에 연행된 뒤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 다녔다.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것은 해방 이후인 1947년이다.
김 할머니는 1992년 3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스스로 공개하며 일본 정부가 철저히 외면했던 위안부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같은 해 8월 제1차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에서 증언을 한 김 할머니는 19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일본군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김 할머니는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서울 종로구 구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늘 모습을 드러내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투쟁에 앞장섰다. 병상에 누워 있었던 지난해 11월에도 수요집회에서 “아베는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절규를 토해냈다.
같은 해 9월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는 1인 릴레이 시위 때는 복강경 수술을 받은 몸을 휠체어에 의지해 참석하기도 했다. 이날 방문한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에겐 “우리가 했다, 미안하다, 용서해주시오, 그렇게 말해달라고 아베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할머니는 참혹한 전쟁의 피해자로서 국내외 다른 재난 피해자들에게도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대지진 당시 피해자들을 돕는 모금활동에 참여했고, 2012년 3월 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함께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하기도 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유엔인권이사회와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 각국으로 해외 캠페인을 다니며 전시 성폭력 반대운동에도 동참했다. 국경없는기자회는 2015년 5월 김 할머니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0인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김 할머니의 빈소는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김 할머니가 떠나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이제 23명밖에 남지 않았다.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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