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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1년] 대본에 성희롱 예방수칙… 스타급은 예방 교육 불참

입력
2019.01.29 04:40
수정
2019.01.29 09:5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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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는 어떻게 바뀌었나

CJ ENM 제작 드라마는 대본 앞면에 성희롱 예방 수칙이 수록돼 있다. 예방 수칙이 담긴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는 관계자의 모습을 한국일보 기자가 대신 표현해 보았다. 배우한 기자
CJ ENM 제작 드라마는 대본 앞면에 성희롱 예방 수칙이 수록돼 있다. 예방 수칙이 담긴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는 관계자의 모습을 한국일보 기자가 대신 표현해 보았다. 배우한 기자

지난해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미투 운동이 핵폭탄급 위력으로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지 1년.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는 위계상 약자라는 이유로 오랜 세월 침묵을 강요당했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세상을 바꿨다. 2016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펼치며 어느 분야보다 앞장서 성폭력 추방에 나섰던 문화예술계는 1년간 미투 운동을 주도했고, 성평등 실현을 위해 지금도 일상 속 미투를 실천하고 있다.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은 “미투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됐다”며 “성 감수성과 인식 체계가 혁명적으로 변했다”고 입을 모은다.

성폭력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 성폭력을 특정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지 않고, 그런 행위를 묵인해 온 문화계 전체의 책임이라는 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드라마 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과거엔 성폭력이라고 인지조차 못했던 언행이 당사자에겐 엄청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 말과 행동에 신중한 분위기가 문화계 전반에 조성돼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그룹 CJ ENM 계열 케이블 채널과 지상파 방송사 SBS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의 경우, 미투 운동 이후 대본 맨 앞장에 성희롱 예방 수칙을 수록하고 있다. 어떤 행위가 성희롱인지,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으로 제시했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관계기관과 담당자 번호도 안내했다. CJ ENM 관계자는 “대본이 없는 예능프로그램에도 성희롱 예방 지침을 효과적으로 공유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드라마 대본 책에 실린 성희롱 예방 수칙.
드라마 대본 책에 실린 성희롱 예방 수칙.

영화계는 한층 적극적이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제작 지원하는 영화의 경우 제작자 및 감독의 성범죄 이력을 확인하고 촬영 전에 제작 참여자 전원이 반드시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도록 의무사항으로 규정했다. 상업영화에서도 성희롱 예방 교육 필요성에 공감해 영진위에 먼저 신청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영진위가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시행한 회수가 2017년에는 5회에 불과했으나 2018년에는 미투 운동 이후인 3월부터 12월 첫째 주까지 92회에 달했다. 영화제(21회)와 영화단체(28회), 대학 영화 전공 학과(6회)보다 영화 제작 현장(37회)이 더 많았다. 영진위 관계자는 “성희롱 예방 교육이 자리잡아가고 있음에도 유명 배우와 감독 등 위계상 우위에 있어 성폭력 가해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교육에 불참하는 사례가 많다”며 “이를 강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2년여 준비를 거쳐 지난해 3월 출범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은 성폭력 피해 접수와 상담뿐 아니라 법률지원과 의료지원도 하고 있다.

지난해 3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소개 및 활동계획 발표 기자회견에서 든든의 공동 센터장인 심재명(왼쪽) 명필름 대표가 임순례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언을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지난해 3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소개 및 활동계획 발표 기자회견에서 든든의 공동 센터장인 심재명(왼쪽) 명필름 대표가 임순례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언을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미투 운동이 가장 뜨거웠던 공연계에서도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 주축이 돼 성폭력 예방 교육 가이드 ‘불편한 연극’을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현장에서 실제 벌어진 사례를 극화해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 문화계 성폭력 대응책을 두고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도 적지 않으나 현장 목소리는 다르다. 중고등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한 연극배우는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친밀함의 표현과 성희롱을 확실히 구분하고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교육 현장에서 큰 효과가 있었다”며 “간단한 성희롱 예방 가이드라인만 지켜도 불미스러운 사건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관련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하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이후 영화계는 2017년 한국영화산업 단체협약 및 한국영화산업 노사 표준계약서에 ‘성폭력 문제 발생시 관련 법률로 징계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문단 거장들의 성폭력 논란으로 직격탄을 맞은 출판계 역시 성폭력 책임 조항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2017년 문학과지성사와 출판 계약을 맺으며 관련 조항을 넣은 임솔아 작가는 당시 “계약서상 ‘갑’인 문인으로서 이 조항은 어찌 보면 내게 불리한 것인데도 문단 성폭력이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요구해 조항을 넣었다”며 “문단 내 성폭력 폭로가 이어졌지만 계약서에 관련 조항이 없어 출판사가 조치를 취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년 사이 변화가 작지 않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피해자 지원책이 여전히 미흡할 뿐 아니라 이미 마련된 지원책도 잘 알려지지 않아 구제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피해자의 용기 있는 폭로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여전하다. 방송가에선 여성 스태프와 함께 일하기를 꺼려하는 연출자도 있다. 이만재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조직국장은 “미투 이후 성폭력 예방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고 지상파 방송 3사가 자체적으로 내부 신고 기구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장 스태프는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설령 안다고 해도 회사 내부에 신고하기 어렵다는 정서가 강하다”고 지적했다. 홍태화 전국영화산업노조 사무국장은 “자정 노력과 교육 시스템만으로는 성폭력 근절에 한계가 있다”며 “제도적 변화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표향ㆍ양승준ㆍ강지원ㆍ양진하ㆍ한소범ㆍ강진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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