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920년 출옥 후 서로 다른 길로… 11명 중 7명만 건국훈장 추서
목숨을 걸고 2ㆍ8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11인의 당시 20, 30대 청년들은 1920년 출옥 후 서로 다른 길을 택하며 갈라졌다.
이 가운데 이광수와 서춘은 1930년대 중일전쟁을 전후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둘은 모두 2009년 정부가 발표한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 대표적인 친일 인사다. 2ㆍ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는 2월 8일 독립선언 이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감옥살이를 면했다. 그는 임시정부에 합류해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을 맡으며 발행과 편집을 책임지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2년만에 갑작스럽게 귀국한 뒤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며 조선 민족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일하며 대표적인 민족주의 이론가로 활동, 사회주의 세력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후 이광수는 자신이 가담한 동우회가 독립운동단체로 지목되며 재판을 받던 중 1938년 전향을 선언, 신궁참배를 하기에 이른다. 1944년에는 학병지원까지 독려하며 대표적인 친일인사가 됐다.
도쿄 유학시절부터 명연설가로 유명했던 서춘은 출옥 후에도 동아일보(1926년), 조선일보(1933년)에 몸담으며 경제 강연의 명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서춘은 1942년 ‘징병제 실시 기념논문’ 현상 모집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고, 1943년 전국을 무대로 일제의 전쟁을 찬양하는 강연회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서춘은 1963년 2ㆍ8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지만, 친일행적이 문제가 돼 1996년 서훈이 취소됐다.
지난해 11월 2ㆍ8독립선언100주년기념위원회, 재일본한국YMCA,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공동주최로 열린 2ㆍ8독립선언 인물 강좌에서 송현강 한남대 교수는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해 일본이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전시체제기 식민지 조선 사회에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던 시점에서는 지조가 지식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며 “이광수는 민족주의 계열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대중 계급 중심의 전위당 결성 노선에 대항해서 민족적 가치를 재차 강조하다가 결국 파시즘적 요소마저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극우의 반열에 들어서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한편 2ㆍ8독립운동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백관수는 공과가 교차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20년대에는 조선일보 편집 책임자를 맡았고 동아일보 일장기 삭제 사건 후 1937년 정간 상태였던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시기 백관수는 군인을 지원하는 전시 협력 조직 조선군사후원연맹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경성군사후원연맹에 참가했다.
이 외 1945년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월북한 최근우를 제외한 나머지 7인은 모두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2ㆍ8 독립운동을 주도한 최팔용과 2ㆍ8 운동 전 국내에 파견돼 도쿄 유학생의 독립운동 의지를 전달한 송계백은 1920년대 초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2ㆍ8독립운동에서 결의문을 낭독했던 김도연은 미국 유학을 다녀와 교육계, 실업계에서 일하다 1942년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휘말렸다. 조선어사전편찬 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김상덕은 출옥 후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에 합류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제헌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윤창석은 교육계에서, 김철수는 조선물산장려회에 몸담았고 일제강점기 별다른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이종근은 해방 후 민족주의 정당들의 국민운동추진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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