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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티즌 오블리주

입력
2019.01.28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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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밑 선배들과의 술 자리에서 한 해를 뒤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물을 좀 헤프게 쓰는 잘못을 고해했다. 그러고 말았으면 큰 사달은 나지 않았을 텐데 다른 잘못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엄청 혼났다. 수학을 좋아하다가 정작 법을 가르치고 있는 한 교수의 ‘적당히 나쁜 사람들의 사회(Moderately Bad PersonㆍMBP)’라는 글이 문득 떠오른다. 음주운전은 하지 않지만 종종 불법유턴을 한다. 길거리에서 불법 DVD를 사면서도 중국에서 우리 가수의 불법 음반이 대량 유통되는 것에 분개하는 소시민이 MBP란다. 어떤 MBP는 승진하기 위해 상사의 비윤리적 행위를 돕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MBP들은 거짓말하는 자녀들을 호되게 꾸짖고 정직과 용기의 덕목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불우이웃 돕기에도 힘을 보탠다. 매일 만나는 이웃이고 거울에 비친 나다. 크게 다를 것도 없는 MBP 중 하나가 물 낭비만 자복하고 다른 잘못들은 가리고 숨겼으니 선배들 눈에 얼토당토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나가던 모임에서 몇 번 마주치기도 한 ‘착한’ 탤런트 C씨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기부와 선행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연예인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진 사람과 힘센 사람 등 특정 계층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온정을 베풀며 인류애를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보편적 상식에 따라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시민 모두가 사회적 책무를 실천할 주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똑부형 셀럽’인 그의 공이 크다.

최근 패션계에서 주목을 받는 인조 모피는 ‘아주 멋진 가짜’의 좋은 예다. 진짜보다 ‘고급스런 가짜’를 선호하는 것은 동물복지와 환경 문제를 챙기는 컨슈머 오블리주의 실천이기도 하다. 구스 패딩을 업사이클링 하거나 버려진 천막으로 핸드백을 만든다. 라면 하나를 사도 착한 기업의 제품을 사겠다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컨슈머 오블리주가 공유경제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기도 한다. 중국의 대표적 자전거 공유 업체 오포(ofo)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싼 가격에 스마트폰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 기업 가치가 한때 3조 원 넘게 치솟았지만 파산설까지 나돌며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자전거를 빌려 탄 뒤 지정 장소에 놓고 가는 자율 거치 방식은 무단 주차로 이어졌고 자전거 무덤이 생길 정도로 도시 미관도 크게 훼손됐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오포가 하는 똑같은 사업모델이 기존 자전거 공유 서비스를 넘어설 만큼 성업 중이다. 프랑스의 질서 있는 시민의식이 낳은 전혀 다른 결과라는 평가다.

구호의 의무를 얘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성경에나 존재하고, 요즘 사람들은 차라리 안전한 곳에서 ‘나쁜 방관자’가 되기를 원한다. 심야열차에서 한 무리의 취객들과 홀로 무모한 대치를 벌이던 나를 눈물로 만류하던 아내도 그 소란을 잠든 체하며 견디던 다른 승객들을 더 야속해 했다. 이곳이 ‘적당히 나쁜 사람들의 사회’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구글의 슬로건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에도 이윤 추구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나쁜(bad) 짓을 할 가능성이 높지만 최소한 사악해지지 말자는 소극적 오블리주가 엿보인다.

돈이 없어도 행복했던 사람들은 어쩌다 백만장자가 되어도 불행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돈이 없을 때 얼간이인 사람은 억만장자가 되어도 얼간이일 수 밖에 없다. 워런 버핏의 말이다. 우리 삶에서 시티즌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이에 공감하고 따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덤으로 따라오지 않을까?

구자갑 롯데오토리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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