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지시 적극가담 이민걸ㆍ이규진 등 법관들 피의자로 재판 넘겨질 가능성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으로 큰 산을 넘었다. 하지만 더 고민해야 할 문제도 남았다. 사법농단에 연루된 법관들에 대해 어느 수준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냐다. 사법농단 수사 과정에서 참고인 등으로 조사받은 법관들만 해도 100명 안팎에 달한다. 일각에선 헌법을 훼손한 중대한 범죄인 만큼 실무자들도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제왕적 대법원장’이었다는 평을 감안하면, 이들 법관 모두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25일 현재까지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이 피의자 신분임을 공식화한 법관들은 이미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비롯해, 양 전 대법원장, 박병대ㆍ고영한ㆍ차한성 전 대법관, 유해용 전 고법부장(현 변호사) 등 6명이다. 하지만 재판 거래 이외에도 ‘법관 블랙리스트’ 등 중대한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가 추가로 드러난 상황이라 피의자로 지목돼 기소될 법관들은 이보다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선 대법원 수뇌부 뜻에 따라 일선 심의관(일반법관)들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데 적극 가담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 고법부장급 고위 법관들은 재판에 넘겨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 전 상임위원은 헌법재판소 견제를 위해 행해진 △옛 통합진보당 관련 재판개입 △헌재 내부정보 유출 등을 총괄하고 양 전 대법원장에 직접 대면 보고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음으로 핵심 연루자로 분류되진 않지만, 이인복ㆍ김용덕ㆍ권순일 전 대법관 등도 기소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 전 대법관은 중앙선관위원장 재직 당시 통진당 재산 국고귀속 소송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 전 대법관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국제법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뒤 강제징용 재판 재상고심을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권 전 대법관은 강제징용 재판 지연 및 국정원 댓글 사건 개입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밖에 당시 사법농단 문건을 작성하거나 전달해 징계를 받은 당시 행정처 심의관들도 기소 대상으로 거론된다.
검찰은 사법농단의 각 개별사건의 역할과 관여한 정도를 기준으로 기소여부를 판단할 방침이다. 다만 대법원장까지 구속된 만큼 일반 심의관들을 기소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기류가 감지된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헌정사상 첫 대법원장 구속은 그가 사법농단 사건 전반을 기획하고 주도했다는 판단 아래 가능했다”면서 “사법농단의 주범이 대법원장이라면 일선 심의관들의 책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수사 과정에서 협조한 일반 법관들을 기소하는 것보다, 이들로부터 법정 증언을 이끌어내는 것이 사법농단 사건 공소유지에 더 도움이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법관들을 무더기로 기소했다가 만에 하나 무죄가 나올 경우의 검찰이 맞게 될 역풍도 만만치 않다.
법조계에서는 주요 죄명이 직권남용이었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수사 사례가 참고할 만한 기준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 사건을 맡았던 박영수 특별검사는 “모두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음에도 핵심적 역할을 맡았던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아니면 장ㆍ차관급 이상의 공무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운 공무원 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지시대로 실행한 공무원들까지 처벌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법 행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한 판사출신 변호사는 “범행에 가담했다는 사실관계가 드러났다 하더라도, 대법원장을 만날 기회도 없었던 심의관급 판사들까지 기소하는 것은 무리”라며 “적어도 대법원장과 대면해 이런저런 의견을 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정도는 돼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양 전 대법원은 구속 이후 처음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피의자 조사를 받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묵비권을 행사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진술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구속기한 만료 시점인 다음달 12일까지 추가 혐의 등을 수사한 뒤 기소할 방침이다. 사법농단 연루 법관들에 대한 사법처리 문제도 이 때쯤 함께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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