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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 칼럼] 정치에서 거짓과 진실

입력
2019.01.25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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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맥켄(H. L. Macken)은 “선한 정치가란 정직한 도적만큼이나 모순적인 표현”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미국은 구체제 유럽에서 난무했던 착취와 억압, 거짓과 위선에 염증을 느낀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가 신의 이름으로 세운 나라다. 달러 지폐에 “우리는 신을 신뢰한다.”는 문구를 새겨놓고 위증을 이유로 대통령을 주저 없이 탄핵하는 나라다. 정치적 청교도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사정이 이럴진대 정치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우리나라에서 정직한 정치인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가 아닐까.

정치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치행위, 전쟁과 외교, 권력투쟁, 토론과 합의를 통한 집단적 결정 등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전쟁과 권력투쟁에서는 패배나 실패의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온갖 방법들이 동원된다. 노골적인 거짓, 위선, 기만, 은폐, 위장, 선동, 위협, 무력 등 온갖 술책과 수단이 사용된다. 생사를 건 싸움에서 정직한 방법만을 고수하는 것은 자해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정직과 신뢰를 금과옥조로 삼는 자유민주주의 정치는 이와 다를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인들의 자기방어 본능이 작용하고 권력과 부의 배분이 정치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공약도 주저 없이 채택한다. 유능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조성하기 위해 과거의 행적을 화려하게 미화하고 결함과 약점을 감추기 바쁘다. 선거철에는 자신을 비난하는 유권자들 앞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억지 미소를 짓는다.(어느 정도의 거짓, 위선, 가식은 모든 인간관계에 필요하다. 도의와 예법의 상당 부분은 사실 상 위선과 가식을 장려한다)

어디서건 집권세력은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공익을 추구하는 것처럼 홍보하고, 정권에 유리한 통계만을 부각시켜 치적을 과장한다. 애당초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남발해놓고도 상황이 변해서 지킬 수 없게 됐다고 변명한다. 국정농단과 권력형 부정부패를 국가기밀 사항이란 구실로 은폐하며,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고 조직적으로 전쟁공포를 조장하기도 한다.

야권도 이에 못지않다. 집권세력의 성과는 최대한 축소하고 실패는 최대한 과장해댄다. 필요한 통계만을 인용하며 정권의 무능력을 공격하는 것도 비슷하다. 집권세력의 잘못은 터무니없이 부풀리고 자신들의 유사한 잘못은 별것 아닌 양 축소한다. 정략적으로 국가위기를 일부러 조장하고서 자신들이 국가를 구원할 메시아라도 되는 양 행세하기도 한다.

이처럼 거짓과 위선이 난무함에도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정직과 신뢰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거짓이 통하는 것도 거짓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직과 신뢰의 문화는 용인할 수 없는 사악한 거짓을 억제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한다. 정치도의와 (헌)법, 권력분립, 자유언론 등 다양한 관행과 제도가 용인할 수 없는 거짓을 색출·단죄함으로써 체제의 붕괴를 막아준다.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정치세계에서 정치적 진실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과학적 사실이나 수학적 사실과 달리, 정치·사회적 사실은 다양한 시각이 경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을 드러낸다. 손혜원 의원 근대문화유산 투기 의혹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공익추구를 가장한 부동산 투기였는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는가. 손 의원의 진심을 명확히 알 수 없는 한 이 논란은 명쾌히 해소할 수 없다. 더구나 손 의원의 의도가 순수했다고 해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및 결과가 상식에 배치되는 면이 있어서 논란이 그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손 의원의 변론, 비판자들의 반론, 다양한 증거, 현지인들과 사회 전반의 여론, 언론의 취재와 분석, 검찰의 조사, 법정의 판결 등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진실이 ‘잠정적으로 구성될’ 뿐이다.(법정의 판결이 곧 정치적 진실은 아니다)

전체주의는 나치즘이라는 ‘커다란 거짓’(Big Lie)이 현실로 구현된 결과다. 다행히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다양한 견해와 거짓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경합하면서 ‘커다란 거짓’의 출현을 차단한다.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다양한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고 있어서 혼란스럽긴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 하나의 큰 거짓이 ‘거짓된 진리’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다.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회의주의자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거짓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상상력과 기억력이 필요하다고 갈파했다. 진실을 은폐할 수 있는 그럴듯한 거짓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그 거짓과 모순되지 않는 또 다른 거짓을 만들기 위해서는 비범한 기억력이 필요해서다. 다행히 우리사회에서는 탁월한 상상력과 기억력을 모두 갖춘 정치인이 없는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 만큼 거짓이 자체의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진실에 굴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김비환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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