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출범 한달 만에 1400억… 여론 눈총 한진그룹 첫 타깃
2달 만에 한진칼 2대 주주로 부상… 국민연금 우군역할 기대도
재계 순위 14위, 매출 15조원(2017년 기준), 임직원 수 2만3,000여명에 달하는 거대기업 한진그룹이 최근 ‘행동주의’를 표방한 신생 토종 펀드에 벌벌 떨고 있다.
펀드의 이름은 ‘KCGI’. ‘한국 기업 지배 구조(Korea Corporate Governance Improvement)’의 영문 앞자리를 딴 것으로, 유명 애널리스트에서 펀드 투자자로 변신한 강성부씨가 대표를 맡고 있어 일명 ‘강성부 펀드’로도 불린다. 강성부 펀드는 작년 말부터 한진그룹 계열사 주식 매집에 나서 순식간에 2대 주주로 떠오르며 경영에 개입할 위치까지 올랐다. 지난 21일엔 그룹 지배구조 등과 관련한 구체적 요구사항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사실상 ‘조양호 회장 퇴진’을 압박하기도 했다. 강성부 펀드가 대체 뭐길래 전통의 한진그룹을 이처럼 몰아부칠 수 있는걸까.
◇왜 한진인가
23일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강성부 펀드는 작년 9월 펀드 개설 1달 만에 약 1,400억원의 투자금을 끌어 모으며 일약 ‘스타 펀드’로 떠올랐다. 이들은 등장과 동시에 자신들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목적”인 행동주의 펀드임을 천명했다.
강성부 펀드는 개설 2달 만에 곧바로 본격 행동에 착수한다. 타깃은 한진그룹이었다. 작년 11월 장내 지분 매수로 강성부 펀드는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한진칼 지분 9%를 확보하며 단숨에 2대 주주에 올랐다. 여세를 몰아 작년 12월 27일엔 한진칼 지분 1.81%(107만주)를 추가로 사들이며 지분 10%를 넘겼다. 이른바 ‘10% 룰(경영참여형 지분 매입의 최저 기준)’을 충족한 것이다.
동시에 강성부 펀드는 또 다른 계열사 한진의 지분 8.03%도 샀다. 그룹 내 계열사 중 상대적으로 적은 시가총액 규모(5,712억원)지만 손자회사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한진을 장악하는 게 한진그룹 지배구조상 경영권 행사에 수월하다는 분석이 압도적이다.
강성부 펀드가 첫 작업 대상으로 한진그룹을 고른 건, ‘전략적 선택’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지분이 많더라도 상대인 대기업을 압박하려면 ‘지배구조 개선 여론’을 등에 업고 꾸준한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한진그룹이 이 조건에 맞았다는 것이다.
사모펀드 업계 관계자는 “조양호 회장의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 사건 이후, 소수 지분을 가진 총수 일가의 비위 행위로 그룹의 주주 전체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 연출됐다”며 “한진그룹이 강성부 대표의 행동주의 펀드 철학에 딱 들어맞는 사례가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부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이 ‘우군’이 돼줄 것이란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강성부 펀드가 올해 주주총회에서 △이사진 교체 △비핵심 사업 매각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하면, 한진칼 지분 8.35%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강성부 펀드 손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주주권 파워’를 높일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강성부는 누구?
강성부 펀드가 한진그룹과 맞대결을 벌일 수 있는 이유로는 무엇보다 ‘시장의 지지’가 꼽힌다. 그 중심엔 강성부 대표가 있다.
강 대표는 금융투자업계에서 진작부터 ‘기업지배구조 관련 전문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대우증권, 동양증권, 신한금융투자 리서치센터에서 채권분석팀장과 글로벌자산전략팀장을 거친 그는 당시 업계에서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라는 보고서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는 2015년 초 기업지배구조 개선 펀드인 ‘LK투자파트너스’에 합류한 뒤, 요진건설산업과 현대시멘트 인수 등을 성공적으로 해내며 ‘국내 최고의 지배구조 전문가’에서 ‘실력 있는 펀드 운용자’로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경력이 현재의 강성부 펀드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강성부 펀드는 특히 사전에 투자처를 정하지 않고 먼저 돈을 투자 받는 ‘블라인드 펀드’ 방식으로 운영된다. 1,400억원을 투자한 이들은 오로지 강 대표의 실력만 믿었다는 얘기다.
더 특이한 점은 통상 블라인드 펀드는 자본력이 든든한 연기금 등 기관 투자자가 동참하지 않으면 제대로 운영되기 쉽지 않은데, 강성부 펀드에는 연기금이 투자하지 않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행동주의를 표방한 강성부 펀드에 돈을 투자했다 자칫 사회적 논란에 휘말릴까 우려해 연기금 등은 투자를 꺼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강성부 펀드에는 현금이 많은 중견기업들이 강 대표의 실력을 믿고 돈을 태웠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강성부 펀드 어디까지 갈까
강성부 펀드는 지난 21일 ‘한진그룹의 신뢰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5개년 계획’을 공개 제안했다. ‘지배구조위원회’와 ‘임원추천위원회’를 설치해 기존 경영진의 영향력이 배제된 위원회로 총수 일가의 경영권 행사를 견제하고, 기업 평판을 실추시킨 임원의 취임을 막자는 내용이다. 사실상 조양호 회장 일가의 경영 배제를 염두에 둔 조치로 풀이된다.
재계에선 강성부 펀드가 그간 경험한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처럼 단기 차익을 노릴 뿐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금융투자업계의 시각은 다르다. 다년간 인수합병(M&A) 업무를 담당한 사모펀드 관계자는 “강성부 대표는 한진그룹의 체질을 개선해 글로벌 운수기업으로 다시 발돋움시킨 뒤 차익을 실현할 것으로 보인다”며 “행동주의 펀드로 유명세를 일으켜 단기간에 주가만 끌어올려 차익을 실현하는 전략은 평소 강 대표 철학과 맞지 않는다”고 맞섰다.
만약 강성부 펀드가 한진그룹의 체질 개선에 성공한다면, 최근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실행 의지와 맞물려 향후 다른 대기업에도 손을 뻗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업계에선 ‘대주주 지분율은 낮으면서, 현금은 많고, 배당에는 인색한’ 기업이 다음 타깃이 될 거란 전망이 높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기업이 네이버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강성부 펀드의 성과는 여전히 의문형이지만 이미 높아진 투자자들의 관심을 감안하면 경영개선 여지가 있는 기업들로 펀드의 관심 반경은 점점 넓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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