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3월, 영국 남부 서식스주 우즈강. 날이 풀려 강물이 많이 불었지만 바람은 아직 쌀쌀했다. 한 여성이 돌멩이를 잔뜩 주워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였다. 남편이 거실에 두고 간 유서를 발견했다. “나는 이걸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요. 나는 당신의 삶을 소모시키고 있어요. 이 광기가 말이죠.” 그는 어린 시절 의붓오빠들에게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한 충격으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평생 성(性)과 남성 혐오감을 안고 살았다.
□ 성폭력은 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철저히 파괴한다. 국내 성폭력 피해 여성 4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트라우마가 전쟁터 군인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77.5%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20.2%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성폭력 트라우마는 완벽하게 치유되기 어렵다. 관련 뉴스를 접하면 당시 기억이 떠올라 불안에 대한 방어 체계가 망가지고 공황발작 환청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피해자를 조롱하고 죄악시하는 분위기는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나를 지켜줄 ‘자기만의 방’으로 침잠하게 한다.
□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체육계 성폭행을 근절하기 위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심석희법’으로 명명했다가 급히 ‘운동선수보호법’으로 바꿨다. 피해자 이름이 노출되면서 생기는 2차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여론 때문이다. 방송인 김미화는 SNS에 “임원들은 책임지고 사퇴하고 ‘조재범법’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썼다. 가해자 이름을 쓰는 것 또한 2차 피해를 유발하고 무죄추정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 성폭력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이겨내려면 자기 상처를 드러내는 게 좋다. 그러자면 주변의 지지와 연대가 필수적이다. 고교 시절 성폭행을 당한 전 유도선수 신유용은 방송에 출연해 “더 이상 나 같은 피해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신유용 사건으로 기억해달라”고 했다. 가부장적 시대를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분노와 고통을 숨긴 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심석희, 신유용은 ‘자기만의 방’에 갇혀 수치심에 떨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고통은 가해자의 잘못임을 용감하게 고발했다. 이제 우리가 피해자들에게 답해야 한다. ‘심석희법’ ‘조재범법’을 놓고 고민하지 않는 사회가 정상이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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