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주변의 어른들은 광주 사람들을 ‘하와이XX’라고 욕설을 얹어 불렀다. 버터 먹는 미국인처럼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순진하게도, 나는 광주 사람들이 모두 미국 하와이 출신인 줄 알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광주사태나 폭동이라고 했다.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대한민국을 뒤엎으려 한다는 뉴스가 연일 방송을 탔고, 그때부터 광주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로 보였다. 광주에서 대구번호를 단 차량을 타고 다니다 봉변당했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렸다.
입시지옥에 갇혀있던 대구의 수험생에게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대학에서 광주 친구들을 만나고서야 잠재의식 속에 봉인됐던 화두가 해제됐다. 그들이 하와이 출신인지, 정말 빨갱이인지, 대구 차량은 진짜 봉변을 당했는지 검증해야 했다. 광주 친구들은 하와이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고, 머리에 뿔도 달려있지 않았다. 봉변 얘기에는 황당한 듯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대구사람들의 생각은 그 후에도 한동안 바뀌지 않았다. 직접 만난 광주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줘도 겉모습에 속고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광주를 직접 가본 사람은 많지 않은데도,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서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숭례문 현판에 남대문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고함치는 격이었다. 불신의 벽은 높았다.
수십 년간 대구와 광주를 갈라놓던 이 벽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이다. 당시 두 도시의 의료산업 발전 업무협약을 계기로 영호남 화합 모델이 탄생했다. 바로 ‘달빛동맹’이다.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벌과 광주 빛고을의 앞 글자를 따 만들어진 말이다.
달빛동맹에 힘입어 대구-광주 간 고속도로는 조기 확장됐고, 학술토론회와 공연, 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어졌다. 대구대표단은 2013년부터 매년 광주에서 열리는 5ᆞ18 민주화운동기념식에 참석하고 있고, 광주도 대구의 2ᆞ28민주운동에 어김없이 화답하고 있다. 대구와 광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웃이 되고 있다.
최근 대구는 경북과 또 다른 동맹을 맺고 있다. 권영진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분기별 교환근무를 통해 상생협력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0월2일 권 시장이 ‘1일 경북도지사’가 되고, 이 지사가 ‘1일 대구시장’이 됐을 때도 정치인 출신단체장들의 전시행정이라는 평가가 주류였다. 권 시장도 쇼라고 시인했다. “쇼이기는 한데 대구경북 주민들을 위한 쇼라면 계속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교환근무가 지난 16일 이어졌다. 두 단체장은 대구공항 통합이전 후보지인 의성과 군위 일대를 같이 둘러본 후 구미의 상생음악회에도 참석해 우의를 과시했다. 대구취수원 구미 이전 움직임을 둘러싸고 양 도시간 소모적인 갈등을 없애자는 배경이 깔려있는 음악회였다. 취수원의 ‘취’자도 꺼내지 않은 이날 음악회는 그것만으로 양 도시민들이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 지사는 이날 “대구공항 통합이전이 먼저 확정되면 부산 가덕도신공항 건립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상생 메시지도 내놨다. 실현성 여부는 둘째치고 영남권신공항 문제로 두 동강 난 대구경북과 부울경(부산ㆍ울산ㆍ경남)의 민심이 누그러질 수 있는 단초는 제공했다. 상생 행보가 ‘TK 프레임’에 갇혀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어느 정도 걷힌 셈이다.
한때 ‘정치인이 지역감정을 조장한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지역감정이야 산과 강으로 가로 막힌 동네 간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데 그 말이 맞았다. 돌이켜보면 지역감정은 절대적으로 정치의 산물이었다. 역설적으로 정치인들은 해묵은 감정을 풀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한반도 해빙무드를 보면서 남북의 묵은 감정들도 정치로 풀리기 바란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정치에 기대본다.
전준호 대구한국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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