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주문모의 피신과 다산의 배교 문제
◇밀고자 한영익은 다산의 사돈
주문모 신부를 검거하려면 그를 국경에서부터 데리고 온 윤유일과 지황, 그리고 계산동에서 그를 모시고 있던 최인길의 입을 어떻게 해서든 열어야 했다. 하지만 채제공은 뜻밖에도 가장 핵심 증인 셋을 저녁에 붙들어와 이튿날 새벽에 죽여 버렸다. 조선의 일반적인 사법 체계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이 이 일을 얼마나 다급하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처리 결과였다. 이밖에 홍낙민(洪樂敏)과 김종교(金宗敎), 허속(許涑) 등 5인이 더 붙들려 왔지만 이들은 신부의 소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얼마 후 모두 풀려났다. 주동자 셋을 죽여 입을 막아 애초에 없던 일로 덮을 작정이었다.
한영익의 밀고는 핵심 인물인 주문모 신부를 놓치는 통에 별 소득 없이 끝났다. 그 대신 조선 천주교회의 주요 인물 세 사람이 하루 밤 사이에 참혹하게 죽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1795년 가을에 한영익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죽을 때 탄식하며 후회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썼다. 한영익은 조선 교회의 유다 이스가리옷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한영익에 대해 더 언급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4년 뒤인 1799년 10월, 서얼 조화진(趙華鎭)이 이가환과 정약용을 천주교 일로 무고하면서 한영익이 그의 심복이라고 했다. 정조는 한영익이 주문모를 고발한 자인데 어떻게 이가환과 정약용의 심복일 수 있느냐며 말도 안 되는 무고라고 내쳤다. 다산은 이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화진이 한영익에게 구혼했는데, 한영익이 듣지 않고 그의 누이동생을 나의 서제(庶弟)인 정약횡(丁若鐄, 1785-1829)에게 시집 보냈다. 이 때문에 한영익을 죽이려 꾀하다가 나에게까지 미쳤던 것이다.”
한편 1795년 당시 정약횡은 고작 11세였다. 서모(庶母) 김씨의 소생으로 다산은 그를 몹시 아꼈다. 정약횡의 혼인은 15세쯤인 1799년 즈음의 일일 것이다. 한영익에게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소재를 알려 준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누이는 나중에 다산의 서제인 정약횡의 아내가 되었다. 다산은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켜 놓고, 몇 해 뒤 밀고자인 한영익과 사돈을 맺은 셈이다. 이 가운데 뭔가 드러나지 않은 그늘이 있다. 전후 맥락이 잘 맞지 않는다. 어쨌든 1795년 가을에 비참하게 죽었다던 구베아 주교의 편지와 달리, 한영익은 1799년까지는 건재하고 있었다.
◇장작 광에 숨어든 주문모 신부
북경 교구 구베아 주교가 신부를 구출한 무관에 대해 진술했고, 이를 다산의 ‘자찬묘지명’과 겹쳐보면 그 무관은 다산일 수밖에 없다. 구베아 주교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전해 들었을까. 편지를 보면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간 지 2년만인 1796년 양력 9월 14일에 보낸 보고를 통해서였다. 그냥 무관이라고만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주문모 신부는 자신을 구해준 다산의 정체를 자세히는 몰랐던 듯하다. 아니면 만에 하나 편지가 발각되었을 때를 대비해 구체적 인명을 거론하지 않는 관습 때문일 수도 있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연락이 두절되자 북경 주교는 불안을 느꼈고, 뒤에 북경에 온 조선 사절단을 탐문해서 그 사이 조선에서 벌어진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접했다.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어 이미 순교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주문모 신부는 고발 직후 무관 복장을 한 채 단숨에 달려온 다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그는 어디에 숨었던 걸까. 남대문 안쪽의 강완숙이란 여인의 집 뒤편, 장작을 쌓아놓은 광 안이었다.
그곳에서 신부는 석 달을 숨어 지냈다. 한 집에 살던 강완숙의 시어머니나 전처 소생의 아들조차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을 만큼 보안이 철저했다. 간발의 차이로 절박한 위험을 벗어났기에 신부의 소재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실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강완숙과 그녀의 여종 한 사람만 이 사실을 알았다. 신부마저 잡혀 갈 경우 조선 천주교회의 운명은 생각만 해도 암담했다. 신부는 철통 보안 속에 보호되었다. 석 달 뒤 그녀는 시어머니를 설득해 신부를 마침내 안 사랑의 다락방으로 불러 들였다. 이후 6년간 주문모 신부의 주된 거처는 이 사랑방이 되었다. 여자만 있는 공간 깊은 안쪽에 그는 숨어 살았다.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어떻게 보호했는지는 1801년 4월 강완숙 집안의 계집아이 심부름꾼이었던 김월임(金月任)이 천주교 죄인으로 끌려가 심문에 대답한 공초(供草)로 알 수 있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 실린 이 기록에 따르면 강완숙의 가족은 주인 집 가운데 방에 주 신부를 시골 친척이라 하면서 숨겨 두었다. 그 방에는 강완숙 모녀만 출입할 수 있었다. 강완숙은 이따금 혼자 그 방에 들어가곤 했는데, 들어갈 때마다 안에서 자물쇠를 잠갔다. 자신이 궁금해 창 틈으로 엿보려 하면 강완숙의 시어머니가 대경실색하며 이를 막아, 김월임은 그 집에 6년간 머물면서 한 번도 주문모 신부의 얼굴을 본적이 없을 정도였다.
◇다산, 채제공을 협박하다
다시 정리해 보자. 한영익은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즉시 대궐로 달려 가 이석과 다산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다. 이석은 즉각 채제공에게 보고하고, 채제공이 정조에게 알렸다. 그 사이에 다산은 주문모 신부의 은신처인 계산동으로 달려 가 그를 남대문 안 강완숙의 집에 피신시켰다. 실로 간발의 차이로 주 신부는 화를 면했다.
채제공의 지시에 따라 포도대장 조규진이 체포조를 보냈을 때, 주 신부는 이미 몸을 피한 뒤였고, 최인길은 주 신부 행세로 시간을 더 끌었다. 주 신부를 놓쳤다는 보고가 올라갔을 때 의심의 눈길이 다산에게 쏠린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벽위편’ 권 4의 ‘경신년에 사학이 더욱 극성을 부리다(庚申邪學愈熾)’ 조에는 “중국인을 놓친 뒤에 임금께서 정약용이 틀림없이 그의 종적을 알고 있을 테니 그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하라고 했지만, 중국 사람을 구해낸 것이 본시 그들이 한 짓이었으므로 끝내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보인다. 주문모를 빼돌린 것이 다산인 줄을 정조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째서 정조는 다산을 더 다그치지 않았을까.
채제공도 화가 났다. 마침내 그는 이가환과 이승훈 및 정약용에게 죄주기를 청하는 차자(箚子)를 올릴 작정을 하고, 초고를 써서 자리 밑에 넣어두었다. 자신의 손발을 제 손으로 자르려 결심한 것이다. 집안 사람 채윤전이 이 상황을 알았지만 글에 적힌 논의의 강도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새벽, 아들 채홍원이 아침 문안을 들어와 말했다. “아버님! 간밤에 정약용이 왔었습니다.” 채제공이 눈을 치뜨며 아들을 보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말하더이다. ‘대감께서 우리 세 사람을 죽이려 하시는데, 우리 셋이 죽으면 자네가 홀로 편안할 성 싶은가? 자네는 못 들어 보았나? 물에서 사람을 밀치면 그 사람이 반드시 손을 당겨 물속으로 함께 들어간다는 말을 말일세.’ 약용의 이 말이 몹시 두려워할만합니다. 차자를 올리신다면 반드시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만약 우리를 내치면 혼자 죽지 않고 같이 끌고 들어가겠다는 서늘한 협박이었다. 이 말을 들은 채제공은 눈을 꽉 감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는데 수저를 거꾸로 세워 밥상머리에서 탁탁 치는 소리가 밖에 자꾸 들렸다. 종일 말없이 분노를 삼키던 채제공은 밤에 등불을 켜자 자리 밑에 넣어두었던 차자를 꺼내 불살라 버렸다. 이재기의 ‘눌암기략’에 나오는 한 단락이다.
‘눌암기략’에는 이것을 1795년 겨울의 일이라고 썼다. 하지만 다산은 이해 7월 26일부터 12월 25일까지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내려가 있었으므로, 정황상 이는 1795년 7월의 상황으로 보인다. 주문모의 체포에 실패한 후 임금 정조는 다산이 주문모 신부가 숨은 곳을 알 것이라고 했고, 채제공은 다산을 아예 내칠 생각을 했다. 이는 두 사람 모두 주문모의 도피에 다산이 관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또 다른 정황 증거다.
◇다산은 정말 배교했을까?
이 지점에서 정말 궁금해지는 질문이 있다.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다산은 정말 신앙을 완전히 버렸을까.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을 다산이 몰랐다는 구베아 주교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다산이 배교를 공언해 천주교회 내부에서 그에게 경계의 눈길을 보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부의 입국과 그가 체포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다산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길로 달려가 신부를 구출하고 자청해서 피신시키기까지 했다.
주문모 신부가 피신했던 집 주인 강완숙 골롬바는 원래 충청도 덕산에 살았다. 그녀는 대장부 기질의 스케일이 큰 여성이었다. 그녀는 예산의 공씨(孔氏) 노파에게서 처음 천주교를 배웠다. 1791년 진산 사건 당시 그녀도 천주교도로 잡혀갔다가 풀려났고, 이 일로 그녀는 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녀는 남편과 헤어져 시어머니와 전처소생의 아들과 함께 상경했다.
그녀는 ‘사학징의’에 실려 있는 1801년 5월 22일의 공초에서 자신이 정약종, 정약용, 오석충, 권철신, 문영인 등과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진술했다. 당시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도 이미 압수된 상태였다. 강완숙과 정약용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다.
이즈음에 충남 보령에서 천주교도 방백동(方百同)이란 자가 검거되었다. 그는 아주 작은 책자를 비밀스레 간직하고 있었다. 그 책에는 경외(京外) 천주교도의 이름이 잔뜩 적혀 있었다. 이가환이 맨 앞에 나오고, 정약용 형제의 이름이 뒤이어 나왔다. 여기에는 홍낙민과 이기양을 비롯해 상민과 천민 백여 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당시 천주교도 검거를 지휘하던 김이양(金履陽)이 놀라 비밀 공문으로 임금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정조가 이 글을 이익운(李益運)에게 보여주었다. 이익운이 그 말을 퍼뜨려 밖에 소문이 쫙 퍼졌다. 그 사이에 명단에 올랐던 사람들이 죄다 달아나 잡을 수가 없었다. 이 또한 ‘벽위편’에 나온다.
다산은 이 때 겉으로는 자신이 배교했음을 공언했다. 하지만 신부의 체포 위기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의 손길을 뻗었던 것을 보면, 속으로는 자신의 배교를 후회하고 신앙 회복의 열망을 간직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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