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권의 책’을 바닥부터 쌓아 올리면 얼만큼의 높이일까. 한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고도 남는다. 온통 글쓰기에 빠져 있는 작가가 ‘100권의 저작’이라는 높고 커다란 산 하나를 오롯하게 이뤄냈다. 그런 성취는 어떻게 가능하며, 또 무엇이 그토록 그를 끊임없이 쓰게 만드는가.
최근 100번째 책이자 18번째 시집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를 펴낸 장석주(64)시인을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나 물었다. “실은 정확히 100번째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멋쩍게 웃었지만 ‘100’이란 훈장을 가슴에 단 것처럼 얼굴이 빛났다.
1979년 첫 번째 시집 ‘햇빛사냥’을 시작으로 100이란 숫자에 도달하기까지 40년. 데뷔한 1975년부터 헤아리면 44년. 그 중 25년을 장 시인은 전업작가로 살아왔다. 그 소감을 “경기를 완주한 마라토너의 기분”에 빗댔다. “심장이 파열할 듯한 고통을 견뎌내면서 포기하지 않고 완주선에 도달했을 때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쯤 되면 우승 여부나 기록이 중요하지 않아요. 완주했다는 게 중요하죠. 대견하다고 스스로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44년이 순탄하게만 흘러온 것은 아니었다. 데뷔하고 차린 출판사가 승승장구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1992)가 외설 시비에 휘말려 발행인으로서 옥고를 치렀고, 거의 모든 걸 잃었다. 남은 건 글뿐이었다. 1993년 전업작가로 들어섰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오직 쓰는 삶을 살았다. 장 시인은 그렇게 시, 소설부터 문학평론, 인문서적까지 쓰는 치열한 ‘문장 노동자’가 됐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성실하게 문장으로 노동한다. 2017년 한 해엔 책 8권을 써냈다. ‘읽고 쓰는 일’ 이외의 모든 것을 소거하고 살기에 가능한 일이다.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요. 아침에 사과 한 알과 우유 한 잔, 치즈 한 조각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점심 시간 전까지 꼬박 앉아 글을 쓰죠. 글 쓰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니 오후에 피트니스 센터에 나가 한 시간 정도 운동 합니다. 그리고는 책을 읽어요. 원칙은 하루에 한 권씩 읽는 겁니다. 늦어도 9시 전후에는 잠에 들죠. 술도 끊은 지 오래됐고, 사교생활도 거의 하지 않아요. 모든 생활의 초점을 쓰고 읽는 데에만 맞추다 보니 이제는 뇌 자체가 읽고 쓰는 뇌로 바뀐 것 같아요.”
새 시집에는 2015년부터의 생활과 감정이 담겼다. 아내인 박연준(39) 시인과 함께 살기 시작한 때부터다. 시집에 나오는 서교동, 연남동, 합정동, 망원동은 박 시인과 신혼의 달콤한 추억을 쌓은 곳이다. 장 시인은 시집 서문에 ‘아내 박연준에게’라고 적었다. 100권의 저작 중 단 한 사람에게 책을 헌정한 건 처음이라고 하다. “앞서 여러 번의 사랑을 겪었고, 결혼도 해봤던, 사랑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던 사람이 다시 사랑에 눈을 뜬 계기를 다룬 시들이에요. 이를테면, 사랑의 탕아가 다시 사랑의 품으로 돌아온 느낌으로 쓴 시랄까요.”
장 시인 부부는 2015년 산문집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2015)를 함께 내 결혼을 알렸다. 각자 읽은 책을 함께 묶은 독서일기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2017)도 냈다. 장 시인의 삶은 절반이 박 시인, 나머지 절반은 책인 것 같았다. 박 시인 이야기를 하는 장 시인의 표정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그것이었다. “박 시인을 만나고 타인과 세계에 대한 관용의 품이 넓어졌다고 할까요. 글쓰기에도 그런 마음이 자연스레 스며들었겠죠.”
이번 시집이 사랑의 충만과 기쁨으로 넘실대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을 찬미하다가도, “어떤 사랑은 빨리 끝난다/애써 더 사랑한 사람이 더 슬프다.”(‘내륙의 운문집’)고 읊조리곤 한다.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가듯, 사랑 역시 시작되는 순간 끝을 향해 달려가잖아요. 너무 행복한데, 거꾸로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데서 슬픔이 나오죠. 찰나에서만 타오르기 때문에 애틋하고 빛나는 사랑, 결국 그런 사랑의 힘으로 인류가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어요. 이번 시집은 그런 경이로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집을 추천해 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사랑에 실패해본 경험이 있지만, 여전히 사랑에의 희망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란다.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은 사랑 에너지가 고갈돼 회의감에 휩싸여 있거든요. 이 시집은 그런 고갈된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계기가 될 거예요. 사랑에 실망하고 낙담한 자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괜찮아 다시해 봐, 사랑은 할 만한 거야’ 라고 말해주는 시집입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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