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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요구 반영한 콘돔… ‘밝히면 헤프다’ 편견 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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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요구 반영한 콘돔… ‘밝히면 헤프다’ 편견 깨야죠”

입력
2019.01.22 04:40
수정
2019.01.23 11:4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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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전용 성인용품 회사 ‘세이브앤코’ 박지원 대표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자사 제품을 들고 있다. 박 대표는 ‘세이브’의 모든 제품이 여성의 니즈를 제품에 반영해 남성중심의 성인용품 시장을 확장시키려는 '사회적 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제품 판매수익금의 10%를 성 평등, 여성권리증진 캠페인에 쓴다. 이한호 기자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자사 제품을 들고 있다. 박 대표는 ‘세이브’의 모든 제품이 여성의 니즈를 제품에 반영해 남성중심의 성인용품 시장을 확장시키려는 '사회적 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제품 판매수익금의 10%를 성 평등, 여성권리증진 캠페인에 쓴다. 이한호 기자

이달 초 청와대에 사표를 낸 탁현민 대통령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 2년 전 임명됐을 때, 그의 자질 논란은 전문 영역이 아니라 저급한 성인식, 그 인식을 굳이 말과 글로 드러낸 경박함에서 비롯됐다. 문화행사 기획·연출자로 활동한 당시 낸 저서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비하했던 그는 ‘콘돔 사용은 섹스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저속하고 무책임한 말로 임명 전부터 뭇 여성단체들의 사퇴 요구를 이끌어냈다.

탁 행정관의 논란으로 표면화 됐을 뿐 한국에서 ‘피임은 여성의 몫’이고, 드러내놓고 성을 말하는 여성이 ‘헤프다’는 편견은 굳건하다. 세계보건기구 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60%이상은 어떤 종류의 피임도 하지 않고 상대방에 피임을 일임한다. 한국의 콘돔 사용률은 OECD국가 중 가장 낮은 11.5%(2015년 기준). 한국 여성의 콘돔 구매율은 미국 여성의 절반 수준인 20% 미만이다.

시각디자이너인 박지원(34) 미국 텍사스대학 오스틴캠퍼스 교수가 지난 해 9월 국내 선보인 ‘세이브(SAIB)’는 이런 편견을 뒤집기 위해 만든 성인용품 브랜드다. 15일 서울 세종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박 교수는 “아예 편견이란 뜻의 영어 단어(bias)를 뒤집어 브랜드 이름을 삼았다”고 말했다. ‘여성이 만든, 여성을 위한 브랜드’란 슬로건으로 여성 건강을 위한 프리미엄 콘돔, 질염 등을 예방할 수 있는 클렌징 티슈와 수딩 젤 등을 넣은 ‘러브 키트’ 등을 출시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 중인 박 교수는 조만간 미국 생활을 접고 ‘세이브’ 운영에 집중할 계획이다.

박 교수가 창업을 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대학시절 삼성디자인멤버십에서 활동한 그는 정규코스처럼 밟는 삼성전자 입사 대신 멤버십에서 만난 동료 둘과 함께 디자인전문기업 ‘데어즈(DAREZ)’를 공동 창업했다. 회사가 자리 잡으면 3할은 사회적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목표를 삼았지만 이행은 쉽지 않았고, 뜻있는 동료들과 다시 비영리 사회적기업 ‘1/2 프로젝트’를 공동 창업했다. “도넛, 음료수, 물병 같은 공산품을 절반으로 나눈 제품을 제작해 구매자가 나머지 절반에 해당하는 제품 가격까지 기부하는 방식이었죠. 실제 제품을 만들려면 공장의 생산 공정을 다 바꿔야 하거든요. ‘젊은 친구들 의도는 참 기특한데, 우리 회사는 아직 여력이 없다. 글로벌 기업이 참여하면 고려하겠다’ 국내 기업 수십 군데에서 퇴짜를 맞았어요.”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 2011년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국무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했고, 2013년 졸업 직후 텍사스대학에 부임했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세이브를 창업하게 된 건 “여러 겹의 우연”이 겹친 결과다. 먼저 미국 학생들에게서 받았던 충격이다. 사회적 인식 개선, 공공캠페인 등 비영리목적의 ‘문제 해결 방안’을 가르치는 ‘사회적 디자인 수업’ 첫 시간, 박 교수는 “당신 주변의 문제 하나를 찾고 해결방안을 담은 디자인 제품을 설치하고, 반응을 다큐멘터리로 찍어오라”고 주문했다. 교수 부임 후 학생에게 제시한 첫 과제였다. 조용하게 수업만 듣던 “매우 내성적인” 한 여학생이 제출한 과제물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학교 보건소의 무료 콘돔을 대량 수집해 금요일 밤 축제 현장에서 나눠주는 ‘세이프 섹스 존’을 운영하고 그 반응을 찍은 다큐멘터리였다고. “과제물을 교실 앞에서 발표하고, 제가 첨삭 의견을 내는 수업인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한데 그 수업에서 얼굴 빨개 진 건 저 혼자였고, 20여명 학생 모두가 굉장히 진지하게 피드백을 하는 거예요. 성문화, 성인식이 이렇게 다르구나, 깨닫는 계기가 됐죠.” 핸드크림 하나 살 때도 화학 성분을 죄다 찾아보는 박 교수는 이 수업을 계기로 각종 콘돔의 화학 성분을 검색했고, 꽤 많은 유해 성분이 콘돔에 함유됐지만 별다른 제재나 정보 공개 없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재작년 초 안식년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다. 왕년의 동료들과 모인 저녁 자리에서 국내 화장품 트렌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레드오션이 된 K뷰티의 타계책으로 누군가가 일본의 ‘수치 화장품’을 제안한 게 발단이었다. “이를테면 여성 생식기 염색제 같은, 여성들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화장품이 유행이라는 거예요. ‘여성에게 수치심을 안김으로써, 기존에 생각하지 못한 필요성(needs)을 인지시켜 새로운 시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여성 화장품을 판다는 분이 이런 사고를 한다는 데에 화가 났고, 이런 화장품이 여성 몸에 좋겠냐고요.” 불현듯 4년 전 사회적 디자인 수업 후 찾았던 콘돔 성분이 생각났단다. 박 교수는 “진짜 여성에게 필요한 건 ‘유해성분 제로 콘돔’ 같은 여성의 몸에 유익한 제품”이라고 쏴 준 뒤 저녁 자리를 파했다.

석 달 뒤 박 대표의 말을 귀담아 들었던 ‘데어즈(DAREZ)’ 공동 창업자가 “그 콘돔 회사 차릴 테니 브랜드, 제품 디자인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박 교수는 그가 했던 많은 디자인처럼, 브랜드 네이밍과 제품 디자인 시안을 보냈다. 몇 달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엔 “투자 할 테니 아예 회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몇 달 고민 끝에 수락했고 지난해 2월 정식으로 회사 ‘세이브앤코’를 차렸다.

여성의 ‘민감한 몸’을 제품에 반영하는데 초점을 맞춘 콘돔은 100% 천연 라텍스로 만들고, 모든 제조과정에서 동물성 성분을 뺐다. 남성의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넣은 각종 화학 자극제와 색소, 향료도 뺐다. 살정제인 노녹시놀-9, 촉촉함을 유지하는 글리세린, 사정 지연을 위한 마취성분인 벤조카인, 라텍스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 니트로사민(2급 발암물질)과 파라벤 등이다. 콘돔은 미국 식약처의 의약품 제조시설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s)인증과 유럽에서 품질을 인정하는 CE마크를 획득했다. 수딩 젤은 약산성인 pH4~5로 맞춰져 질염을 예방한다. 클렌징 티슈는 100% 순면을 쓴다. 패션 편집샵, 뷰티스토어, 여성 속옷매장과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했던 세이브의 제품은 석달 간 1억5,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달 중순 편의점 세븐일레븐에도 입점했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물론 성인용품 사업을 하는 건 만만치 않다. 국내 콘돔 제조사는 딱 두 군데이고, 여성을 타깃으로 한 콘돔 시장 자체가 없다. 박 교수가 “OEM방식으로 제작해 애초에 생각한 요구사항을 다 담을 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이유다. “이 브랜드가 커져 20만개, 30만개를 생산하게 되면, 제조사도 우리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되겠죠. 까다롭게 요구할수록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도 고객이란 걸 보여주면 여성의 요구를 고민할 수밖에 없겠죠. 그게 이 브랜드를 만든 이유 중 하나예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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