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마이너리티] <22> 보호종료아동
※ 대부분의 사람은 적어도 한 두 가지 측면에서는 소수자입니다. 자신의 불편은 크게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수자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인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화요일 한국 사회에서 유독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서 서무 일을 보는 김민정(20ㆍ가명)씨는 회사 내에서 ‘짠순이’로 불린다. 점심 식사는 늘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동료들과 5,000원짜리 커피 한 잔도 함께 사먹는 법이 없지만, 추가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야근 업무는 가장 먼저 자처해서다. 주말에 친구들과 모임을 갖거나 영화를 보면 3만~4만원 지출은 우습기 때문에 가급적 약속도 잡지 않는다. 물건을 사기 전 최소 10번 이상은 고민하고, 꼭 필요한 물건은 ‘최저가’를 찾아야만 구매한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가본 적도 없다.
김씨가 이처럼 허리띠를 졸라 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김씨는 출생 직후 부모에게 버려져 태어난 직후부터 아동보육시설(보육원)에서 생활하다가 18세가 되던 해에 시설을 나와 독립한 ‘보호종료아동’이다. 시설에선 의식주가 모두 해결됐지만 이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이 크다. 현재는 친구와 함께 월세를 얻어 살고 있는데 하루 빨리 돈을 모아 전세를 얻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월급 130만원 중 70만원을 꼬박꼬박 저축한다. 그러나 장래에 대해선 고민이 많다. 그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중요해 취직부터 했는데 월급이 워낙 적어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악바리처럼 열심히 돈을 모아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아동양육시설이나 그룹홈, 위탁가정 등에서 생활하던 시설아동은 18세가 되면 국가의 보호조치가 종료돼 지내던 시설에서 퇴소해야 한다. 2013~2017년 5년간 연평균 2,470명이 보호종료 조치됐다. 이들은 법적으로 성인이지만 자립능력이 불완전한 채 사회에 진입한 탓에 ‘가난의 굴레’를 벗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부의 대물림이 고착화된 사회에서 불평등한 기회를 노력으로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 퇴소 후 반복되는 빈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발간한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에는 아동양육시설 등에서 보호종료조치된 2,593명이 사회로 나왔다. 이 가운데 32%(835명)는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LH임대주택이나 자립지원시설, 공동생활가정 등에서 살고 있었지만 68%(1,758명)는 개인이 월세를 부담하거나 기숙사, 친인척 집 등에 머무르고 있었다. 10명 중 7명 가까이가 김씨처럼 ‘주거비 부담’에 시달린다는 얘기다.
시설아동 대다수는 퇴소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학 진학보다 취업을 택하고 있었다. 전체 보호종료자 중 대학진학자는 4년제 160명, 3년제 이하 195명 등으로 진학률이 13.7%에 그쳤다. 이는 2017년 전체 고교졸업자의 대학진학률(68.9%) 5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 상급 학교 진학률도 낮지만 제대로 된 취업 교육의 기회가 적다 보니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다. 2017년 보호종료자 가운데 38.8%(1,006명)이 취업에 성공했는데, 취업자 2명 중 1명은 서비스 판매직이나 단순노무 업종에 종사했다.
일자리의 질이 낮다 보니 경제적 어려움도 클 수밖에 없다.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아동자립지원단의 ‘2016 보호종결아동 자립실태 조사’를 보면 퇴소 5년 이내의 보호종료자(1,221명)들은 종결 이후 가장 어려운 점으로 경제적 어려움(31.1%), 주거문제(24.2%), 심리적 부담감(10.1%), 돈 관리 지식부족(7.7%) 등을 꼽았다. 보호종료자들의 1년간 평균 근로소득은 1,483만원으로 월 평균 임금이 123만원에 불과했다. 10명 중 4명은 기초생활수급자 경험도 있었다.
◇ 부족한 준비에 “미래 불안”
실제로 보호종료자들이 맞닥뜨린 가장 큰 어려움은 빈곤이다. 5년 전 서울의 한 보육원에서 나온 강주영(24ㆍ가명)씨는 “고등학생 때 미술 학원에 다니며 재료비 등으로 돈을 많이 쓰다 보니 퇴소할 때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후원금 통장에 남은 93만원 뿐이었다”고 말했다. 시설에서 나오면 지방자치단체의 자립정착금(300만~500만원ㆍ2018년 기준), 디딤씨앗통장(CDA)으로 모은 적금, 후원금이 자산의 전부다. 그는 “당시 대학에 갓 들어갔을 때라 교재비, 오리엔테이션 비용 등 돈을 쓸 일이 많았는데 자립정착금도 퇴소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입금돼 불안했다”며 “운이 좋게 자립생활시설에 입소해 주거비와 생활비를 아끼지 않았다면 돈이 없어 대학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적 빈곤은 불안과 외로움을 부추기기도 한다. 지난해 지내던 보육원에서 나와 지방의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는 이아름(20ㆍ가명)씨는 최근까지 지독한 우울증을 겪었다. 이씨는 대학등록금을 내지 않고 국가장학금을 받으려면 공부도 해야 하고 아르바이트도 필수인데,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편하게 공부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부러움을 느끼면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우울감에 빠져 스스로를 돌보지 않다 보니 건강도 악화됐다. 이씨는 “집(보육원)에서는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이모(사회복지사)들이 챙겨주셔서 늘 배가 불렀는데, 혼자서 챙기기 귀찮고 돈도 아까워 최대한 먹지 않고 버티다 보니 살이 9kg이나 빠져 어지럼증에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자립 준비가 돼 있지 않은데도 등 떠밀리듯 사회로 나오다 보니 ‘사회 부적응자’로 전락하는 사례도 있다. 경기지역의 한 아동복지시설 자립전담요원은 “한번은 시설에서 지냈던 남학생이 자립정착금을 PC방과 클럽 등에서 다 써버리고 휴대폰 요금도 내지 못할 처지라고 연락을 해와 달려가 보니 방안이 쓰레기장처럼 돼 있고 게임 중독인 아이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며 “퇴소 후 시설로 계속 연락을 해오면 문제 해결을 돕고 각종 정부 지원도 연계해줄 수 있지만, 퇴소자 절반 이상은 퇴소 후 1년 뒤면 연락이 끊겨 도움을 줄 방법이 마땅치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 자립 성공 모델 늘리려면
시설아동들은 15세 때부터 시설 내 자립전담요원의 도움을 받아 진로를 고민하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보호종료자들이 시설 울타리를 벗어나 자립에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개개인의 취업이나 적성보다는 ‘안정된 돈벌이’를 우선 가치로 두다 보니 진로변경으로 인한 휴학이나 자퇴가 잦고, 직장을 얻어도 만족도가 낮아 이직도 흔하다. 서울의 한 보육시설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보면 각자의 욕구를 반영해 취업ㆍ진학지도를 해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안정된 수입을 얻는 게 우선이라 당장 취업이 쉬운 직종을 주로 권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립에 성공한 이들은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성남보육원에서 퇴소한 복싱선수 배영식(22)씨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소개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사회복지사의 권유로 복싱을 시작하면서 운동선수로서 꿈을 키우게 됐기 때문이다. 현재 대전대학교 사회체육학과 3학년에 재학 중으로 전국대회에 수 차례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배씨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고아라고 놀리는 바람에 늘 의기소침했었는데 운동을 시작하면서 ‘잘 한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하니 자신감도 생기고 친구관계도 덩달아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우연히 운동을 접한 뒤 적성을 찾았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보육원 아이들이 좀 더 많은 진로체험과 교육의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보호종료아동들의 ‘18세 퇴소’ 기준이 너무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청년들의 취업이 늦어지면서 일반 가정에서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캥거루족’이 늘어나는 등 자립시기가 점점 늦춰지는 것과 비교하면 시설아동의 보호종료 시점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 시설에서 퇴소를 하여도 생일이 지나지 않은 시설아동은 핸드폰을 자신의 명의로 구입을 할 수 없어 법적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아동복지법을 개정해 보호종료연령을 21세로 일괄 상향시키고, 별도의 자격 요건이 없어도 보호종료 대상자의 요청만으로도 보호기간을 연장하는 등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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