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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시민사회를 위한 적절한 이름짓기

입력
2019.01.19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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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한 한국인이 으레 그러하듯이 나 또한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에서 꾸준한 불행을 느낀다. 이름이 너무 길다. ‘예프’나 ‘스키’로 끝나는 러시아 사람 이름마냥 너무 길다. 발음마저 ‘간장공장공장장’ 시리즈보다 난해하니 빠르고 부드럽게 말하지도 못한다. 전화로 내 위치를 묻는 동료 시민에게 “난 지금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나고 있어”라고 할 때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해야만 한다.

이름이 그저 길기만 한 것도 아니다.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창조’, ‘경제’, ‘혁신’이라는 세 단어의 조합이라 줄여 읽기 난처하듯,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은 ‘동대문’, ‘역사’, ‘문화’, ‘공원’이라는 묵직한 네 단어의 조합이라 어느 것 하나 생략할 수가 없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슬기로운 한국인이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나 또한 줄임 시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지금 동역공역 근처야”하면, “어디라고?” -“동대문역문공역” -“그게 뭐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라고!” 항상 이런 대화를 하게 된다.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을 줄여 읽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항상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이 이름을 어떻게 줄일지 시민사회의 합의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떠올려보아도 ‘동역사’, ‘동역공’, ‘동역문공’, ‘동문공’, ‘동공원’ 등 쟁쟁한 후보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 중 ‘동역사’가 온라인 여론에서 약간의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어느 후보도 일천만 서울시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지 않다. 게다가 어느 이름을 정통으로 삼아도 문제는 남는다. 예를 들어 ‘동역사’로 줄여 쓴다면, 그 발음을 ‘동역싸’로 할 것이냐 ‘동녁싸’로 할 것이냐 하는 발음 상잔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탕수육이 부먹이냐 찍먹이냐로 멱살잡이를 벌이는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이것이 역 이름이 바뀌고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대문운동장역이라는 예전 명칭이 계속 쓰이는 이유다. 그나마 발음과 이해가 편하고 다툼의 소지가 덜한 이름이라서다. 그런데 이 구수한 옛 이름을 외국이나 지방에서 온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 마치 어느 어르신께서 “서울운동장역에서 만나세”라고 하시면 그 말을 들은 젊은이가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기다리듯이. 결국 서울운동장역에서 동대문운동장역을 거쳐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으로 점점 길어진 이름이 소통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원흉이다.

역 이름에 ‘역사’와 ‘문화’라는 단어가 붙었다고 실로 그런 거창한 공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디자인플라자에 딸려 있는 자그마한 산책로를 가리켜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이라고 한다. 그 작은 공간에 동대문역사관과 서울 성곽터와 옛 야구장 및 축구장의 흔적을 보존하였으니 그리 붙인 이름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딸린 공원과 산책로 이름은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겨울밤에도 소리질러 고성방가 공원’이다. 길고 화려한 이름이 꼭 좋은 이름은 아니다. 북녘 동포들은 그들의 최고 존엄을 말할 때 ‘경애하는 위대한’으로 시작하는 긴 이름을 붙이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 가운데 “우와! 정말 멋있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고작 지하철 역 이름에 불행을 느낀다는 하소연에 가벼이 웃지만 마시라. 이는 소통의 불편을 겪는 시민사회를 마주한 자의 깊은 슬픔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이름의 수정을 제안하는 바다. 강남역은 서울 강남역에 있고 노원역은 노원구에 있다.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은 서울 중구에 있으므로 내 추천은 ‘중역’이다. “나 지금 중역 근처야”라고 쉽고 빠르게 대화하는 상상을 해 보시라. 아니면 그 근처 평화시장에서 먼저 가신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의미에서 ‘전태일역’도 괜찮겠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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