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레슬리 스미스(1923~2018)
해리 레슬리 스미스(Harry Leslie Smith)는 1923년 2월 25일 영국서 태어나 만 95년을 살다간 영국인이다. 생의 끄트머리 10년, 특히 90대의 5년이 없었다면, 그를 알고 오래 기억할 이는 아마 드물었을 것이다. 그는 2009년 회고록 ‘폐허 속의 사랑 Love among the Ruins’을 시작으로 다섯 권의 논픽션을 썼고, 앞선 세 권은 자비 출판이었다. 트위터 계정을 열어 세상에 말을 건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그의 글은 매력적이었다. 자신이 살아낸 20세기 근 100년의 경험과 사회의 변화, 특히 현재의 정치ㆍ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지적들은, 나직하지만 선동적이었고 단정하면서도 과격했다. 가장 값진 매력은, 험한 세월을 견뎌 자수성가한 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 혹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 경험을 특권화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과 자기 세대가 겪은 과거의 불리를 전시하면서 그것들로 자기 세대의 성취를 치장하거나 현재를 긍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리를 극복하기 위해 그의 세대가 추구한 사회적 이상과 가치, 거기 기반해 자신들이 누렸던 사회ㆍ경제적 기회와 가치에 주목했고, 그 이상이 퇴색돼가는 현실, 극단화한 빈부격차와 초라해진 사회보험, 전쟁과 난민, 청년 세대의 실업과 가난에 분노했다.
대서양 양편의 시민들이 그의 글에 열광했고,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와 영국 노동당수 제러미 코빈을 비롯 25만여 명이 그의 트위터를 기다려 열렬히 호응하곤 했다. 영국 가디언 등이 그의 글을 청했고, 다양한 곳에서 그를 강연자로 초청하곤 했다.
자칭 “세상에서 가장 늙은 반골 the world’s oldest rebel”인 그가 2018년 11월 28일 별세했다.
해리 스미스가 태어난 곳은 요크셔의 석탄도시 반즐리였다. 광부 아버지가 부상으로 실직하면서 스미스는 7살 때부터 이웃 맥주 가공업자의 수레를 끌어야 했다. 밥을 구걸하거나 식당 쓰레기통을 뒤지는 건 예사였고, 집세를 못내 도망치듯 이사를 다녀야 했고, 구빈원(workhouse, 공공 빈민쉼터)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고 한다. 1차대전 후 영국은 전쟁 부채 때문에 극도의 긴축재정을 고집했고, 가난한 이들의 삶은 한 세기 전 디킨스의 시절보다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 그의 가난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세 살이던 1926년, 7살 위 누이(Marion)가 폐렴으로 숨졌다. 병원비는커녕 구빈원 보건소까지 갈 차비조차 없어 부모가 겨울 외투를 전당포에 맡긴 일, 누이의 시신을 묘비도 없이 무허가 빈민 묘지에 묻은 이야기를 그는 훗날 책에 썼다.(nyt, 2018.11.30) 13세에 이웃 식료품 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하면서 학교를 중퇴했다. “읽고 쓰는 실력도 온전치 않았지만, 당시 내겐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thestar.com, 2014. 9.26)
스미스는 41년 영국 공군에 입대해 2차 대전에 참전했고, 독일 함부르크 주둔군으로 지내던 중 독일 여성 엘프리데 에델만(Elfriede Edelmann, 1928~1999)을 만나 47년 결혼했다. 반독 정서가 험해 대개의 영국인들은 근년의 극우주의자가 동유럽 이민자를 대하듯 독일인을 대하곤 했다고 한다. 부부는 53년 캐나다로 이주해 온타리오의 벨빌(Belleville)에 정착했고, 스미스는 한 카페트 수입-판매회사에 취직해 일을 배운 뒤 자기 가게를 차려 독립했다. 가장 많이 번 해의 일년 수익이 5만 달러 남짓이었다지만, 그 벌이로 부부는 집을 샀고, 집 때문에 진 빚을 갚았고, 그럭저럭 네 아들을 교육시켰다. 장남 존은 “아버지는 당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좀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론토의 노숙자들을 보거나 청년들의 가난을 보면 실패한 정치에 대해 성을 내곤 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이룬 소박한 성취조차 꿈꾸기 힘들어진 청년세대의 현실을, 만성적 청년 실업과 주택난, 천정부지의 집값을 안타까워했다는 거였다. 1999년 그는 52년을 해로한 아내를 암으로 잃었고, 10년 뒤인 2009년 둘째 아들을 역시 병으로 잃었다.
첫 책 ’폐허 속의 사랑’은 에델만을 만나 함께 산 세월을 회고하는 내용이지만, 거기엔 자신이 보고 겪은 전후 폐허의 유럽과 전장을 떠돌던 2,000만 피난민들의 참상이, 21세기 유럽 난민들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었다. 이듬해 낸 ‘1923: A Memoir’은 더 본격적인 자서전이었다. 그는 전후(戰後) 30년대의 궁핍서부터 2차대전의 비참, 전후 애틀리 노동당 정부의 복지정책과 70년대의 불황, 대처의 신자유주의 이후 재현된 가난과 복지의 후퇴를 되짚으며 21세기의 노숙자와 전쟁ㆍ분쟁 난민들을 겹쳐 보게 했다. 40, 50년대의 유럽(또는 세계)은 지금처럼 냉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전후 마셜플랜과 애틀리 정부의 복지정책처럼, 세계와 국가와 사회가 가난을 이해하고 책임지려 했다는 이야기, 다시 말해 경제적 정의와 평등 평화의 인류애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 그리고, 대공황에 버금가는 충격을 안긴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서민들의 피눈물을 이야기하면서 사태의 장본인 그 누구도 책임지거나 처벌받지 않은 현실을 고발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벼락처럼’ 알려진 건 2013년 전사자 추모의 날(11월 11일)을 앞두고 가디언에 기고한 ‘올해 나는 마지막 포피(poppy)를 단다’란 제목의 칼럼 덕이었다. 붉은 개양귀비 ‘포피’는 1차대전 캐나다 군의관 출신 시인 존 매크레(John McCrae)가 전사한 친구를 애도하며 쓴 시 ‘플랑드르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 전몰 군인 추모의 꽃이다. 그는 “오늘날 영국의 정치인들은 공공선의 이름으로 긴축재정을 정당화하고,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방편으로 포피를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거나 온전한 육체와 정신으로 사회에 복귀하지 못한 내 전우와 친구들을 기리며 포피를 달아왔지만,(…) 베테랑으로서의 나의 추모행위가 정치인들이 이라크에서 저지른 어리석은 전쟁과 도덕적으로 미심쩍은 테러와의 전쟁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썼다. 국가는 그들의 죽음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으로 치장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오늘날의 개 집만도 못한 집에 살며 극한 환경과 저임금 속에 노동하던, 진짜 자유가 뭔지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이었다고, “내 삼촌과 친척들처럼 대부분 국가에 의해 강제징집 당하거나 푼돈의 월급을 받기 위해 전장에 간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이해를 대변해준 정치인은 없었다”고도 썼다. 그런 뒤 “내년에 91살이 되는 내겐 그 일들이 불과 얼마 전 일처럼 생생하다”며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시민 모두 독점적 기업들이 좌우하는 국가적 의제에 휘둘리는 (의무의 주체인) 납세자가 아닌 (권리의 주체인) 시민으로서 스스로 존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의 글은 순식간에 200만여 명이 읽었고, 저마다 공감과 응원의 감흥을 남겼다.
이듬해 8월 그는 ‘뉴스테이츠먼’ 칼럼에서 영국 정부의 무기 수출 통계를 인용하며, 그 무기들이 빚을 전쟁과 학살과 고문과 강간에 대해, “군수업체의 주문 전화벨 소리에 가려질 가자지구와 바그다드 시민들의 비명과 절규”에 대해 썼다. 그리고, 무릇 정치인은 이상과 비전과 용기로 국가의 품위를 지탱할 줄 알아야 한다며, 200년 전 영국이 고부가가치의 노예무역을 금지함으로써 세계의 문명화를 선도한 역사를 환기했다.
2015년 9월 나치의 영국 폭격을 기념하는 ‘본토항공전(Battle of Britain)’ 기념식장에서 코빈 노동당수가 국가(國歌) 제창을 거부한 일을 두고 극우진영이 맹비난을 퍼붓던 무렵, 스미스는 트위트에 이렇게 썼다. “2차대전 공군 베테랑으로서, 나는 코빈의 침묵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독재자들에게 총을 팔아먹는 정치인들이다. 솔직히 더 화나는 것은 우리 세대의 영웅적 행위로 자신들의 (반이민) 인종ㆍ민족주의를 치장하려는 자들이다.” 2015년 5월 아일랜드가 동성결혼을 법제화하자 그는 “희망과 존엄과 인권이 증오와 아집과 공포를 이긴다는 사실을, 아일랜드가 온 세상에 알린 위대한 날”이라고 적었고, 그 해 6월 한 한 미국인 치과의사가 짐바브웨의 전설적 사자 ‘세실’을 사냥한 일을 두고는 “치과의사가 사냥하는 데 5만 달러를 썼다는 건, 부자들에게 세금을 제대로 걷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썼다. 그는 캐나다의 한 병원 인사부에 근무하는 며느리의 연봉이 25만 달러가 넘는 사실을 소개하며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면서 그만한 돈을 받는 게 나로선 납득이 안 간다. 물론 며느리는 내가 그런 말을 하면 듣기 싫어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2018년 6월, 영국 iTV가 가장 자랑스러운 영국의 제도를 묻는 대규모 설문조사를 벌였다.영국인들은 의회민주주의의 역사(38%)와 왕실의 입헌군주제(28%)를 제치고, 압도적 1위(54%)로 국가보건서비스(NHS)를 꼽았다. 1948년 시작된 NHS는 “진료비 지불 능력이 아닌 임상적 필요(Based on clinical need, not ability to pay)”에 근거해 전국민의 포괄적 무료 진료를 보장한 제도다. 재정 적자의 원흉으로, 부족한 의료인력과 낙후한 설비로, 악몽처럼 긴 진료 대기시간 때문에 숱한 비판과 조롱을 당해왔고, 캐머런 보수당 정권(2010~2016)의 민영화(사실상 무료진료 포기) 공세에 시달려왔지만, 영국인의 NHS에 대한 자부와 사수의 의지가 그렇게 입증됐다.
해리 스미스의 2014년 9월 영국 노동당 전당대회 초청 연설 요지도 NHS 수호였다. 당시만 해도 무명이던 그는 자기 소개로 말문을 열었다. “저는 저 격동(the rough and ready)의 1923년, 반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내 유년의 삶이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 20세기 초 영국 배경의 TV드라마)’에 그려진 것과 딴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자비롭고 부유하고 현명한 귀족이 서민들을 보살피는 드라마의 세상과 달리) 야만의 시대였고, 암울한 비문명의 시대였습니다.(…)” 그는 누이를 잃은 이야기, 돈이 없어 암의 고통에 시달리던 이웃들의 신음, 구빈원에 방치되듯 수용돼 있던 가난한 1차 대전 부상자들과 어린이들의 고통이 되풀이되게 해선 안 된다고, “나는 역사가는 아니지만, 내가 바로 역사”라고 호소했다. 그 날 모인 7,000여 명은 두 차례 기립박수를 쳤고, 다수는 눈물을 흘렸다. 2017년 펴낸 그의 생애 마지막 책의 제목도 ‘나의 과거를 여러분의 미래가 되게 하지 말라 Don’t Let My Past Be Your Future’였다.
그를 두고 ‘무식한 늙은이가 정치에 이용 당한다’고 조롱하는 이가 있었고, 책들을 진짜 그가 쓴 건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고, 트위터 관리자도 따로 있으리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같잖은 소리들(fiddlesticks)”이라며 일축했다.(radionz.co.nz) 그리고 “그들은 늙으면 세상을 모르고, 세상 소식을 접할 첨단 기기를 다룰 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40년대 공군에서 송수신장비를 익혔다(…) 살아있는 한 배움을 멈춰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인들도 개인으로서 존중 받기 위해선 죽음을 기다리는 인형처럼 지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17년 가디언 칼럼에서 그는 “부유한 자들이 마치 지혜로운 자처럼 대접받듯이, 요즘은 노인들이 조롱 당하고 무시 당하는 예가 많다”며 “하지만 트럼프와 브렉시트의 이 시대에, 오랜 세월을 살며 얻은 노인들의 지적 자산을 무시하는 것은 갱도 속 카나리아의 죽음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일 수 있다. 적어도 나는 육체적 쇠락과 NHS의 위기에 직면해, 토리(Tories, 보수당)가 두려워 벌벌 떨며 내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진 않을 것”이라고 썼다.
난민-이민자 사태와 유럽의 우경화를 지켜보며 그는, 생애 마지막 사명으로 난민에 대한 인류의 의무를 환기하는 일에 바치겠다며 ‘Harry’s Last Stand Refugee Tour’를 시작했다.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공개한 동영상에서 그는 “2차 대전 중 우리 부대는 이동 중에 가능한 한 피난민들에게 먹을 거리를 나눠주며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무사할 것이라고 안심시키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때 그들의 표정에서 나는 희망의 불꽃이란 걸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정글’이라 불리던 프랑스 칼레의 난민수용소를 방문한 건 2015년 말이었다. 그는 ‘뉴스테이츠먼’ 에세이에서 좁은 공간 안에 수용된 6,000여 난민들의 비참을 소개하며, 그는 다시 1920, 30년대의 영국 빈민가와 40년대의 유럽을 이야기했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버려진 합판을 엮어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를 짓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난민들의 ‘존엄’을 소개했다. 그리고 50년대 세르비아 난민으로 유럽에 건너온 한 친구가 들려준 말을 전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난민캠프에서 국제적십자사가 나눠준 음식봉투를 받아 든 그 친구는 ‘그게 그냥 음식이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 내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의 징표였다’고 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공놀이를 즐기는 11세 고아 난민 소년의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과연 저 아이도 잘 살아남아 지금 나처럼 과거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그는 폐렴으로 온타리오의 한 병원에 입원했고, 수많은 네티즌과 정치인들의 응원 속에 일주일 여 뒤 영면했다. 코빈은 “그는 우리에게 어깨를 내어준 거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며 스미스의 인터뷰 영상 클립을 올렸다. 장남 존은 병상의 그가 잠든 채 자전거 타듯 다리를 저은 일이 있다며 “삼촌 자전거를 타고 사슴들을 뒤쫓으며 놀던 7살 무렵으로 되돌아간 듯했다”고 트위터에 적었다.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의 동동거림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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