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고산(孤山) 유배지…부산 기장읍 죽성리
해안으로 삐죽 튀어나온 바위 언덕에 작은 성당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앞뒤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분위기가 자못 경건하고 고고하다. 종교와 무관하게 누구나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마음이 생길 듯하다. 부산 기장군 ‘죽성성당’은 그러나 실제 성당이 아니라 드라마 세트다. 2009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드림’을 찍기 위해 세웠다. 겉모양은 성당이지만 내부는 작은 전시실이다. 촬영이 끝난 후 철거할 예정이었지만,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입소문이 나면서 아예 관광객을 위한 시설로 재정비했다. 그렇게 죽성성당은 기장과 죽성리의 명물이 됐다.
◇드라마보다 풍성한 이야기 품은 갯마을
죽성리는 기장읍내에서 얕은 산자락을 돌면 나타나는 자그만 해변 마을이다. 원죽, 두호, 월전 3개의 자연부락을 합한 행정구역이지만 꼬불꼬불한 해안을 다 합해도 1.5km 남짓이다. 대부분 관광객이 성당을 배경으로 ‘인증샷’만 찍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지만, 죽성리는 드라마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죽성성당 바로 옆 방파제 초입에 작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황학대’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1618년부터 6년간 기장에 유배된 고산 윤선도가 신선이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중국 양쯔강의 ‘황학루’에 빗대 이렇게 이름 붙이고, 매일 찾았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단층 건물 한 채보다 작은 규모에 비해 해설이 거창하다. 성당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라면 모를까, 신선과 윤선도를 끌어 댈 정도는 아니다.
죽성리에는 윤선도의 명성에 기댄 명물이 또 하나 있다. 마을 중앙 둔덕에 고고하게 가지를 늘어뜨린 ‘죽성리 해송’이다. 품 넓은 소나무가 멀리서 보면 한 그루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다섯 그루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 원래 여섯 그루였는데 2003년 태풍 ‘매미’가 남해안을 휩쓸 때 한 그루가 희생됐다. 해송으로서는 드물게 빼어난 수형을 자랑하고, 다섯 그루가 방사형으로 뻗은 아름드리 기둥 한가운데는 작은 당집이 끼워진 것처럼 들어 앉았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 주민들이 풍어제를 지내고,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서낭당이다. 해송은 어디서 보든 당당하고 기품이 넘쳐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로서 부족함이 없다. 일반적으로 당산나무로는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나 팽나무가 많다는 걸 감안하면 위치와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이 정도만 해도 해송의 가치는 충분한데, 일부에선 윤선도가 심은 나무라며 의미를 부여한다. 수령 250~300년이라는 설명과 맞지 않다.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유배 당시 윤선도의 거주지는 해송이 선 언덕에서 죽성초등학교에 이르는 어느 지점으로 추정되지만, 그가 지은 고산유고(孤山遺稿) 어디에도 황학대나 해송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정작 윤선도의 곧은 마음이 남은 곳은 ‘삼성대(三星臺)’다. 삼성대는 죽성리에서 북측으로 약 6km 떨어진 일광해수욕장 모래사장과 접한 낮은 언덕이다. 가락지 모양으로 둥글게 형성된 해수욕장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높은 건물이 없던 시절에는 당연히 최고의 전망대였다. 지금은 바로 옆에 전망 좋은 카페가 들어 서 있어, ‘삼성대’라는 비각과 시비(詩碑)를 일부러 찾지 않으면 흘려 보기 일쑤다. 윤선도가 ‘동생과 헤어지면서 지어 준 두 수(贈別少弟二首)’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너의 뜻을 따르자니 새로운 길을 얼마나 많은 산이 막을 것이며, 세파를 따르자면 얼굴이 부끄러워짐을 어찌하리오.” 조선시대에도 돈이나 삼베를 내고 죄를 면하는 속전(贖錢) 제도가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보석이다. 윤선도의 이복동생이 죽성리까지 온 이유는 보석금을 내고 그를 한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시에는 편법을 써서 부끄럽게 풀려나기보다 당당하게 형기를 마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그래도 동생을 쫓아가고 싶은 마음까지야 어쩌지 못해 죽성리에서 말을 타고 이곳 삼성대까지 와서 배웅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이어진다. “내 말은 내달리고, 네 말은 더디건만 이 길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있으랴?” 황구 소장은 죽성리 해송과 윤선도를 굳이 연관 짓는다면, “나라에서 내린 벌을 달게 받겠다는 그의 굳은 절개와 닮았다는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라며 무리한 추측을 경계했다.
◇죽성리 왜성과 두모포진성
대나무는 흔히 선비의 곧은 절개에 빗대지만, 지명에 대 죽(竹)자가 들어간 지역은 전쟁의 풍파를 심하게 겪은 곳이기도 하다. 화살의 재료가 대나무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쉽다. 죽성리(竹城里)도 그런 곳 중 하나다. 기장은 고려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고, 울산과 함께 왜군을 방어하는 최전방이었다.
죽성리 해송에서 뒤편 언덕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죽성리 왜성’이다. 순천에서 울산에 이르기까지 남동해안에 30여개의 왜성이 있고, 기장에는 이곳 죽성리와 장안읍 임랑리, 두 곳에 있다. 죽성리 왜성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 왜군 장수 구로다가 축성한 것으로 임진ㆍ정유재란 중 왜군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고 남해안에 장기간 주둔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전란이 끝날 무렵에는 퇴각하는 왜군이 집결한 곳이기도 하다.
죽성리 왜성은 본성(本城)과 지성(枝城)으로 나누어 쌓았다. 4m에 이르는 비스듬한 석축이 남은 본성 꼭대기까지 산책로가 나 있다. 상대방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기 때문에, 성곽은 당연히 최고의 전망대다. 죽성리 왜성에서는 왼편 죽성항부터 오른편 월전포구까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 한가운데 우뚝 선 해송을 중심으로 낮은 언덕배기에 일군 밭과 주택 풍경이 수평선처럼 편안하게 이어진다. 사진 찍는 명소로는 죽성성당을 치지만, 장엄한 일출 분위기를 느끼기엔 이곳이 제격이다.
왜성을 쌓기 전 죽성리에는 조선 수군의 진지인 ‘두모포진성’이 있었다. 고려 초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토성을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을 겪은 후 석성으로 축조했다. 나중에 왜군이 두모포진성과 기장읍성의 돌을 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다. 일부는 왜성의 지성과 겹치고, 400m에 이르는 석성 중 현재는 기장에서 죽성항으로 흘러 드는 하천 주변에 축대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도 안내판이 전혀 없어 오징어 덕장의 경계석 정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왜성이 번듯하게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본성 꼭대기에는 뜻밖에도 비닐하우스 세 동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왜성 일대가 종교단체의 사유지다. 모서리가 허물어진 지성은 일부러 찾아가기도 힘들다. 죽성리 왜성은 1963년 사적 제52호로 지정됐지만, 일제가 만든 문화재는 사적에서 제외하기로 해 1999년부터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로 강등됐다. 일제의 유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분간은 종교단체의 땅이어서 현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해안을 연결한 ‘갈맷길’ 1코스를 따라 죽성 바닷가를 걷다 보면 푸른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의 가뿐 숨소리가 들린다. 죽성성당에서 일출을 보고 두호포구로 나오는 길에 조업을 나가는 해녀들과 만났다.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기 전 모닥불에 몸을 녹인다. 한때 30여명에 이르렀던 죽성리의 해녀는 현재 10명 안팎으로 줄었다. 60대 후반에서 70대로 적잖은 나이지만 한 번 나가면 5시간씩 바닷속을 누빈다. 요즘은 지역에서 ‘앙장구’라 부르는 말똥성게를 주로 잡는데,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한다. 기장 바다와 일본은 여전히 멀고도 가깝다.
기장=글ㆍ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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