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용역업체 유착]
한수원 퇴직자 20여명, 용역업체에 이름만 올려놓고 月수백만원
용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는 방사선 피폭, 쉬운 해고로 고통
1944년생, 75세의 원모씨. 1978년부터 11년 동안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전신인 한국전력공사 고리원자력 방사선관리부에서 일하다가 퇴직 후 용역업체에 취직해 관련 업무를 이어왔다. 운 나쁜 동년배라면 일선에서 물러나 힘겨운 노년을 보내고 있을 나이. 하지만 그는 지금도 한수원의 방사선관리 용역업체 가운데 한 곳인 H사에 기술인력으로 버젓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한수원 출신 용역업체 기술자 원씨는 현장에서 일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그는 집에서 쉬면서 월 수백 만원가량의 급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급여는 에너지공기업 한수원이 지급하는 용역 하청 비용에서 나온다. 원씨는 단지 운이 좋은 사람일까.
원씨와 비슷한 경력을 지닌 한수원 출신 고령자 최소 21명(1명을 제외하고 모두 1940, 50년대생)이 한국일보 취재 결과 국내 방사선 관리 용역업체(총 7곳)들에 두루 ‘기술인력’ 명목으로 등록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술인력’이란 방사선 관리 용역업체들이 각 원자력발전소 응찰에 나설 때 기술력 증명을 위해 의무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인력. 이들은 현장 근로자가 아니어서 사실상 대부분 재택근무를 한다. 상근직이라 할 수 없는 이들 기술인력은 하필이면 한수원 퇴직자들로 상당수 구성되어 있고, 더구나 60,70대 이상 고령자들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방사선 관리 인력을 용역업체에 맡길 뿐 아니라, 이들 업체의 기술인력들이 고령의 한수원 퇴직자들로 채워진 부조리. 한수원은 퇴직자 재취업 창구를 얻고, 용역업체는 하청을 꾸준히 받아내는 ‘원전 마피아의 그림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한수원과 용역업체의 공생 관계를 들여다봤다.
◇용역업체 뿌리내린 한수원 퇴직자들
원씨에게 연락해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H사의 이 모 부장은“원씨는 기술인력으로 부임은 하고 있지만 현재 일을 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월급이 얼마인지는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기술인력’들의 이력서를 볼 수 있는지 요구하자 “기술인력들의 이력서는 업체간 경쟁사항이기 때문에 공개하기는 어렵다”고도 했다. H사의 현장 근로자들은 원씨가 월 수백만원을 급여로 받고 있다고 말했다. 원씨처럼 한수원 퇴직 후 고령에도 불구 방사능관리 용역업체에서 사실상 명의를 빌려주며 월급을 받는 사례는 많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수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신한울 방사선관리 용역 입찰(2016년 시행으로 가장 최근 입찰)에 참여한 7개 용역업체 소속 161명의 기술인력 중 21명이 한수원(전신인 한국전력공사 포함) 출신이다. 용역업체들은 기술력 증명을 위해 23명씩을 확보해야 응찰에 나설 수 있으며, 발전소 별로 계약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거의 매해 입찰이 있어왔다.
1988~2004년 한수원에서 근무한 73세 김모씨, 1978~2009년 근무한 68세 박모씨, 1981~2011년 근무한 66세 윤모씨, 1983~2013년 근무한 65세 신모씨 등이 포함됐다. 21명 중 20명이 62세 이상이었고, 70대도 3명으로 현장에서 일하기 버거운 나이였다. 기술인력들은 등급이 있기 때문에 관련 업무 경력이 길수록 더 대우받고 현장소장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업체당 23명의 기술인력 중 몇 명을 제외하면 거의 재택근무를 한다는 게 현장 노동자들의 설명이다. 한 용역업체 관계자는 “기술인력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일괄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며 “현장 인력에 공백이 생겼을 때 투입되기도 하고 용역업체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말이 좋아 재택근무이지, 전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용역업체들이 응찰할 때 기술인력에게 일정 기간 임금을 줘야 인정받기 때문에 이들은 쉬면서, 많게는 수백만원씩 월급을 받는다. 이 월급은 결국 국민들이 내는 전기료에서 나가고 있다. 방사선 관리 용역뿐 아니라 계측제어정비 용역 등 한수원의 다른 엔지니어링 사업용역까지 포함하면 한수원 출신들의 용역업체 취업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방사선안전관리 노조 관계자는 “애초 용역업체 중에는 한수원 출신이 설립한 곳도 있다”라며 “또 특정 고등학교 출신이 한수원을 꽉 잡고 있어 용역업체 소유주와도 선후배 사이와 같은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 곳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취재과정에서 한수원과 용역업체가 한 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해 10월 말 방사선 관리업무 관련 질문지를 한수원측에 보낸 뒤 다음날 용역업체를 찾아갔을 때 업체 대표는 해당 질문지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한수원측이 용역업체에 대신 답변하도록 질문지를 보내놓았다는 것이다.
◇더 위험한 환경 놓인 용역…우려되는 국민 안전
전문성을 갖춘 용역업체들이 자체 소속 인력들을 계약 현장으로 보내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보통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용역업체’의 존재 이유이다. 하지만 원전 업계에서 본말이 전도된 지는 오래다. 현장의 인력들은 그대로인데, 이 인력들을 ‘인수’하는 업체만 수시로 바뀌고 그 업체들은 인건비에서 일정 부분(용역계약금의 약 70%만 현장 근로자 임금으로 지급)을 빼내 연명한다. 부실한 용역업체에 원전 관리 인력을 맡기는 실태가 국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98년부터 고리1발전소와 2발전소에서 방사선 관리업무를 해온 김명수(가명ㆍ44)씨. 20년간 같은 곳에서 동일 업무(방사선 측정, 방사선 물질 관리, 폐기물 처리 등)를 해왔지만 지금까지 소속 용역업체는 10번 바뀌었다. 한수원이 3년마다 방사선 관리용역업체들의 입찰을 받아 발전소별로 쪼개 계약을 맺어서다. 용역업체들은 새로운 계약을 따내면,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그대로 고용한다. 2000년대 초반에는 거의 1년마다 한 번씩 업체가 바뀌었다. 원래 원자력 본부별(고리ㆍ새울ㆍ한빛ㆍ월성ㆍ한울)로 계약을 맺던 것을 2000년대에 발전소별로 더 세분화해 쪼갰기 때문이다. 김씨는 “당시 더 많은 업체들이 ‘나눠먹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며 “하도 소속 업체가 많이 바뀌다 보니 사장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지난해 9월 3회에 걸쳐 실시된 모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방재 합동훈련. 방사선 관리구역 내에서 피폭된 환자가 발생했을 때 등을 가정한 주요 훈련이다. 그럼에도 한수원이 배포한 훈련일정 안내문을 보면, 발전소 내 방사선비상요원 명단 18명은 모두 용역업체 소속으로 돼 있다. 방사능 유출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 때, 민간 소속인 용역업체 손에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일을 맡기게 돼 있는 시스템이다. 이정윤 원자력 안전과 미래 대표는 “용역업체는 한수원과 갑을 관계가 형성되어 예를 들어 기준치 이상의 오염 수를 내보내라고 할 때 이를 거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우려했다.
실제 원자력 안전기준을 어기고 근무한 노동자는 내부 적발됐는데도 아무런 불이익 없이 근무하고, 한수원에 불법파견 소송을 낸 한빛원전 근로자 13명은 용역업체가 바뀔 때 고용승계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2014년부터 순차적으로 해고됐다. 원전 안전보다 얼마나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다. 당시 숙련 노동자들이 갑자기 해고되면서 한빛원전에서는 방사능 농도도 측정하지 않은 채 29톤의 폐기물을 바다에 버렸다가 적발됐고, 작업자가 무단으로 관리구역 밖으로 나간 사건 등이 발생했다.
용역업체 노동자들의 방사선 피폭 정도는 한수원 정직원들과 차이가 더 커지고 있다. 1인당 피폭 방사선량(국감자료)을 보면, 2013년 하청직원이 한수원 직원의 9.2배, 지난해(9월까지)에는 12.6배에 이르렀다. 김명수씨의 연도별 방사능 피폭이력에 따르면 1998년부터 지금까지 총 160.81mSv(밀리시버트)에 이른다. 김씨는 “기준을 넘은 것은 아니지만, 발전소에 있는 한수원 정규직들과 큰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방사선 위험을 최전선에서 안고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이며, 이들의 업무 안전성과 환경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국민들의 안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방사선 관리의 안전성은 노동자들만의 문제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용역직 정규직화를 둘러싼 갈등
문재인 정부는 2017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계획을 발표하면서 용역ㆍ파견직의 정규직화 기준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방사선 관리처럼 국민의 생명ㆍ안전과 밀접한 직종은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용역업체 하청을 배제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는 실정이다.
국감 자료 등에 따르면 전국 원자력발전소 근무자 1만3,000여명 중 한수원 직원은 52%, 하청직원은 48% 가량이다. 방사선 관리분야 용역인력은 886명(지난해 10월 기준)으로 한수원 소속 직원의 2.4배에 달한다. 2013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한수원의 산업재해 사망자 7명도 모두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산재 부상자도 하청업체 125명(한수원 직원 12명)이었다. 우원식 의원은 “원전 안전 관련 업무 외주금지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핵심공약임에도 한수원, 산업통상자원부, 원자력안전위원회 모두 책임을 미루며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국정과제 이행을 거부하고 있는 명백한 직무유기이며,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위험의 외주화를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
한수원은 지난해 노사전(노동자ㆍ회사ㆍ전문가) 협의회를 구성, 4차례 협의에 나섰고 자회사를 설립해 방사선 관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용역업체들은 협의체를 구성해 소송 계획을 밝히는 등 강력 반발에 나섰고, 정치권 일각에서도 용역업체를 ‘원전 발전에 이바지하는 중소기업’으로 칭하며 이를 막아 섰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김기선 자유한국당 의원은 “방사선 관리 용역업체 근로자 1,200명 중 현장 근로자 900명을 한수원이 고용하면, 나머지 업체 소속 300명이 실업자가 되고 20년 넘게 기술과 인력개발을 투자해온 회사는 문을 닫게 된다”고 용역업체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업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현장에서 보여지는 용역업체의 실상은 대체로 ‘원전 발전에 이바지하는’ 기업의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지난 10일 찾아간 용역업체 S사의 사무실에는 직원이 거의 없었으며, 직원 한 명이 “지금 우리는 방사선 관리를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라며 “담당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사장님은 자리에 안 계신다”고 했다. 그러나 한수원 자료에 따르면 이 업체는 2개 발전소의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방사능 관리 자격을 가진 9개 업체 중 한 곳이지만 2년이 넘도록 용역을 따내지 못한 K사의 관계자는 “회사가 하도 어려워서 대표가 사비를 털 정도”라고 용역 계약금에 의존하는 현실을 설명했다. 과거 발전소 현장에서 일하다가 용역업체의 기술인력으로 옮겼다는 이 관계자는 “아직 50대인데 막막하다”고 했다.
용역업체들은 그 동안 특허 168개를 따냈으며, 탈원전 정책에 필요한 원전 해체 기술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방사선 관리 노조 관계자는 “연구소는 2명만 있으면 입찰 감점을 피할 수 있어 사무실 한쪽에 가림막을 쳐 놓고 잡일 하면서 연구인력이라고 앉아 있는 게 현실”이라며 “특허 땄다고 간혹 한수원에 납품되는 설비들은 거의 실무에 도움이 안 되고 몇 년 후에 폐기처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원전 해체 기술에 대해 이정윤 대표는 “원전 해체는 지금까지 연구용원자로 해체한 것밖에 없고, 오염된 흙을 불투명하게 가져다 버렸다가 문제가 되자 다시 파갔다”라며 “원전 해체와 같은 것은 사실 기술보다는 얼마나 철저히 감시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용역업체들은 한수원이 정규직화를 강행하면 소송을 내겠다는 방침이다. 한수원은 “현재 소방점검 직종에 대해 정규직 전환 합의가 된 것 외에 결정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 한수원은 한국능률협회 컨설팅 용역보고서에 방사능 관리직은 정규직 전환 대상이 아니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이유 등으로 정규직 전환에 소극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해당 용역보고서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보고서에는 “방사선 관리는 민간의 전문 기술이 필요하고, 중소기업 육성 분야에 포함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용조 공공운수노조 한수원 비정규직지회 사무국장은 “용역에 맡긴 지 오래되다 보니까(1990년 방사선 관리 업무 민영화) 한수원에서 이 분야에 너무 무지해 문제다”라며 “방사선 데이터베이스를 분석ㆍ관리하는 현장 인력과 보고서 작성 등 사무를 보는 한수원 정규직이 일원화돼야 토론이 되고 빨리 문제점을 파악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지금 한수원 직원들은 방사선 수치를 봐도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정도”라고 우려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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