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환자 뜻에 반해 강제로 치료해야 하기도 하고, 아무런 신체적 문제가 없는데도 끊임없이 문제를 호소하면서 병원을 찾아 오는 환자를 보기도 한다.
병을 인식하지 못해 원하지 않는 치료를 받았지만 병이 호전돼 고맙다고 인사하는 환자를 볼 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환자가 병이 호전된 뒤에도 대부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았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꺼린다. 병에 대한 인식이 없어도 환자를 치료를 해야 하니, 환자가 적대감을 보이기도 하고, 환자의 망상체계에 의사가 박해자가 되면 환자에게서 공격을 받기도 한다.
환자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치료받을 때 자신의 트라우마를 의사에게 고스란히 투사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환자, 때로는 가족, 인권단체, 보호자 등에게 공격을 받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의 간호사와 직원의 안전을 걱정했던 고 임세원 교수와 그의 죽음을 의연히 대처한 품격 있는 유족의 태도가 많은 이를 숙연하게 했다. 임 교수의 발인식에서 한 필자의 추모사 일부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2018년 12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모든 의사에게 충격의 경종을 울리는 날이었습니다. 의사들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든 힘을 쏟는 장소가 죽음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12월 마지막 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공간에 임세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결과가 너무 안타까웠기에 빈소를 향하는 걸음이 무겁기만 했습니다. 머릿속으로 빈소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고 참담할 줄만 알았던 빈소에서 숭고한 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오빠인 임세원 교수를 살해한 사람에 대하여 ‘낙인을 찍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심신미약 같은 걸로 봐주지 말고 단두대에 매달아라’고 외칠 때, 그들은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지 말고 그와 같은 이들이 치료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임 교수의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감정을 토로하기보다 그가 진정으로 바랐던 소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를 대신해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하였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치 그들의 곁에 임세원 교수가 함께하는 듯했습니다.
자신이 진료하던 환자 때문에 세상을 떠난 임 교수는 생전에 환자를 정말 사랑하고, 그들의 치료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온 세상이 그들을 멸시하고 차별할 때,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삶을 바쳤습니다.
임세원 교수님, 당신은 진정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였습니다. 당신은 우울의 어둡고 깊은 터널을 헤쳐나갈 수 있는 의지를 가졌습니다. 당신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당신은 죽는 순간에도 다른 이를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 4,000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원들은 당신의 의미를 잊지 않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2018년 12월 31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 날은 전국의 모든 정신질환자가 편견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임세원 교수님,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받아 들이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유지를 받들고 이어가는 일은 남겨진 이들의 몫일 것이다. 평소 자살 예방을 위해 힘쓰던 고인은 ‘보고 듣기 말하기’라는 프로그램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보급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공군ㆍ육군 등 군인에게도 이 프로그램을 적용해 일반인은 물론 군대 자살예방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인과 유족의 바람대로 환자와 의료진의 안전한 진료환경이 만들어지고, 정신적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이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정신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임 교수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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