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크 캐시(대량 현금ㆍbulk cash)가 유입되지 않는 방식으로 개성공단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지 연구해봐야 할 것으로 본다.”
11일 더불어민주당 한반도비핵화특별위원회 초청 강연에서 나온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이 한마디는 이날 종일 여러 해설을 낳으며 화제가 됐다.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 연설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조건 없는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 재개’ 의사를 환영하며 “이로써 북한과 풀어야 할 과제는 해결된 셈”이라고 밝혔고, 이게 정부가 본격적으로 개성공단 재가동 준비 작업을 시작한다는 신호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강 장관 발언으로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핵심 선행 과제가 대량 현금 차단인 것으로 인식될 여지가 커졌지만, 문제는 장애가 그뿐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성공단은 첫 제품을 출시한 2004년부터 북한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가동 중단된 2016년까지 남북 간 제도 정비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했으나, 이후 북한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사회 대북 제재망이 촘촘해지면서 장벽이 크게 높아진 상태다. 정부가 ‘제재 틀 내에서’ 개성공단 재가동을 준비하려면 수많은 선결 과제가 남았다는 뜻이다.
개성공단 사업 재개 시 위반 소지가 있는 대표적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로는 △대북 해외투자, 기술 이전, 경제협력을 차단하기 위해 북측과 합작사업(joint ventures)을 금지(이하 2375호) △직물ㆍ섬유 등 경공업 제품 수출 금지 △식품, 농산품, 기계류 등 주요 분야 수출 금지(2397호)가 꼽힌다. 이중 합작사업의 경우 개성공단이 ‘최초 남북 합작사업 성공사례’로 언급돼 온 데다 경협이라는 제재 목적에도 해당돼, 위반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수출 금지 항목도 걸림돌이다. 개성공단기업협회에 따르면 공단에는 섬유, 가죽ㆍ가방ㆍ신발, 화학, 기계금속, 전기전자 기업 등이 입주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개성공단은 주로 임가공 기업이 입주해 있는데 개성에서 제작공정만 거친 제품을 북한의 수출로 볼지는 논란점이다”며 “하지만 그외 기계류 대북 반입 등 제재로 인해 공단 시설 복구작업부터 바로 제재 문제에 걸린다”고 진단했다.
강 장관이 언급한 벌크 캐시는 오히려 개성공단이 운영 중이던 2013년 3월에 의결된 안보리 결의 2094호에 명시된 사항이다. 이 결의는 “회원국은 북한 불법 프로그램에 기여하는 모든 금융 거래 또는 서비스를 차단ㆍ동결한다”며 “벌크 캐시 이전도 금융 제재에 적용된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에는 북한 당국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달러화가 즉시 문제시되진 않았으나 현 제재 국면에서는 이 임금이 벌크 캐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도 일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과제가 하나 더 있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 2월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하며 개성행(行) 자금을 북측 정권 유지와 결부시킨 바 있어, 이 꼬인 매듭을 다시 풀 논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시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으로 유입된 돈의 70%가 당 서기실에 상납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파악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근거자료를 밝히라’는 비판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현 제재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정부가 연일 개성공단 기대감을 띄우는 이유는 뭘까. 일단 북미 대화 재개를 앞두고 북측의 전향적 자세를 이끌어내기 위해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 호응해 줄 필요가 있다는 계산이 섰던 것으로 보인다. 제재완화를 지금 예단할 순 없지만, 추후 협상 진전에 대비해 개성공단 재가동 문제를 미리 내부 검토하는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메시지인 셈이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앞서 1일 KBS 프로그램에 출연해 “현재 상황에서 개성공단도 그렇고, 금강산관광도 대북제재와 무관하게 보기 어렵다”며 현실 가능성은 낮춘 바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정부가 내부 검토 단계에서 나아가 개성공단 관련 포괄적 제재예외 인정을 시도할 수 있다는 관측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합작사업 관련 2375호 결의에 “북한 주민의 민간 요구를 보호하기 위해 북중 수력발전, 북러 나진ㆍ하산 프로젝트는 (금지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을 본떠서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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