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인권센터 제 역할 못해, 비위 용서ㆍ그릇된 관용 반복
지난해 3월 이경희(38) 전 리듬체조 국가대표 코치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 대한체조협회 고위간부 A씨로부터 2011년부터 약 3년간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 코치는 2014년 인권단체와 법조계 도움을 받아 대한체육회에 탄원서를 냈지만, 감사에 들어간 체육회는 A씨가 체조협회에 사표를 내자 더 이상 징계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 코치는 체조협회에 2차 탄원서를 냈지만 “이미 퇴직해 버려 A씨에 대한 징계 권한이 없다”는 답을 듣고 좌절했다.
이후 체조협회는 2016년 여름 A씨를 다시 고위직에 선임하려 했다. 그러나 체육회가 성추행 혐의로 감사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부했다. A씨가 끊임 없이 체조계 복귀를 시도하자 두려움이 든 이 코치는 2017년 A씨를 고소했지만 검찰 조사 단계에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징계도 안 받고 사법 당국의 처벌도 피한 A씨는 이후 슬그머니 다시 돌아와 현재 한 지역 체조협회장을 맡고 있다. “대한체육회에 탄원서를 낼 때부터 A씨가 ‘난 체조계에 꼭 다시 돌아갈 것’이라며 호언장담 했다”는 이 코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이 코치의 성폭력 피해사건 해결 및 수사 검사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도왔던 체육시민연대의 이경렬 사무국장은 11일 “지금까지의 활동 과정을 돌이켜 보면 ‘경악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체육계 특유의 폐쇄성과 불투명성 탓에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조차 제 역할을 전혀 해 오지 못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이 국장은 “체육계 내부에선 권력자들의 비위를 쉽게 용서하거나 그릇된 관용을 베푸는 행위가 반복해 왔다”며 “(이 코치 사례처럼)성폭력을 저지른 간부가 다시 요직에 오르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면죄부를 얻으면서 약자들의 고발 의지는 갈수록 꺾여 온 게 체육계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체육시민연대에 따르면 실제 대한체육회가 체육인들의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운영해 온 스포츠인권센터에서 답답한 행정처리 및 책임 미루기로 진정인에게 더 큰 고통을 준 사례도 많다. 이 국장은 “3년 전 경기 부천시 한 고교야구부 감독이 야구부 행정을 담당한 기간제 교사 B씨를 때려 법원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학교에선 감봉 1개월의 솜방망이 처분을 받았다”며 “스포츠인권센터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접수했지만 10주가 넘도록 답변이 없었고, 처분 권한 또한 경기도체육회 공정위원회에 넘겨졌다”고 전했다. 결국 해당 진정 건은 부천시체육회 공정위원회에 한 차례 더 넘겨진 뒤 ‘이미 사법처리가 된 사건’이란 이유로 추가 처분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국장은 “학교엔 결국 가해자만 남고, 피해자는 떠난 셈”이라며 어이없어 했다.
결국 피해 고발이 더 큰 피해를 불러온다는 인식이 암묵적으로 확산되면서 침묵의 카르텔이 더 단단해진 격이라는 게 이 국장의 진단이다. 그는 “심석희의 용기 있는 고백을 계기로 전ㆍ현직 선수들이 똘똘 뭉쳐 현직 선수들의 고충에 대해 집단대응 할 수 있는 단체를 하루빨리 구성해야 한다”라면서 “특히 성범죄 피해의 경우 경찰 신고가 가장 빠르고 확실하며 해바라기센터나 여성정책진흥원 같은 민간 단체의 도움을 구하는 것 또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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