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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성원 모두 서로에게 천사가 되어야 행복 세상 만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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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성원 모두 서로에게 천사가 되어야 행복 세상 만들 수 있어요!”

입력
2019.01.1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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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란 원복지회, 가나원 요양원 원장을 칭찬합니다

김학란(58ㆍ원복지회, 가나원 요양원)원장이 그동안 걸어온 봉사와 복지에 관한 소신을 밝힌 뒤 활짝 웃고 있다. 강은주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김학란(58ㆍ원복지회, 가나원 요양원)원장이 그동안 걸어온 봉사와 복지에 관한 소신을 밝힌 뒤 활짝 웃고 있다. 강은주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김학란 원장이 밝은 얼굴로 요양원 어르신을 돌보고 있다. 가나원 요양원 제공
김학란 원장이 밝은 얼굴로 요양원 어르신을 돌보고 있다. 가나원 요양원 제공

김학란(58ㆍ원복지회, 가나원 요양원)원장은 전문사회복지사다. 어르신들 배변을 태연하게 잘도 받아낸다. 봉사천사다. 그녀는 사재를 출연해 3대 지원기금을 마련했다. 빈곤노인 자선기금, 복지자선기금, 아동자선기금이다. 대학생 봉사단원들과 재활원 봉사, 무료급식봉사, 농활봉사 등 수많은 봉사활동을 이끌어왔다. ‘1004프로젝트’를 만들어 중국, 태국 등 해외봉사활동으로 민간외교사절 역할도 톡톡히 했다.

“봉사 현장에 가면 쌓아둔 어려운 일을 다 내놓으라고 요청합니다. 뼈 빠지게 일하고 돌아오는 날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몸이 힘들수록 행복감은 배가 되니까 힘든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봉사하는 대학생들도 ‘몸은 힘들었지만 너무 행복했다’는 후기를 보내옵니다.”

◇ “저 여자는 분명 다른 속셈이 있을 거야!”

화려한 외모덕분에 봉사를 하면서 욕도 많이 먹었다.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 원장은 천생 여자다. 멋 내는 것을 좋아한다. 화장하고 자신을 가꾸는데 소홀하지 않는다. 완벽한 자신을 위해 한 치의 허술함도 허락지 않는 노력은 일종의 수련과도 같다. 사람들의 입방아와 달리 그녀의 내면은 측은지심으로 가득 찼다.

“어릴 적 꿈이 수녀였어요. 40세가 되어 성당에 다니면서 본격적인 봉사를 시작했어요.”

봉사를 하면서 학문적인 접근을 시작했다. 48세에 복지 관련논문으로 석, 박사 학위를 땄다. 책으로 배운 복지와 현장의 상황은 차이가 있었다. 체계적인 봉사를 위해 2008년 자원봉사단체인 사)원복지회를 설립했다.

“원은 둥글고 위아래가 없습니다. 복지의 베스트를 꿈꾸며 원복지회를 설립했습니다.”

구청지원금 한 푼 없이 모든 일을 개인 주머니를 털어 추진했다. “풍족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가슴에서 용솟음쳤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700여명의 대학생 봉사단원들과의 만남은 큰 에너지원이 되었다. 매월 대구지역 각 대학생들과 신바람 나게 봉사했다. 에너지가 소진되도록 봉사한 대학생들의 후기는 행복의 덤이었다.

◇ 보다 합리적인 봉사가 필요하다는 깨달음

공부를 하면서 사회적 기업을 알게 되었다. 원사회복지산하 원플러스원 사회적 기업을 창업했다. 착한도시락 사업이었다. 55세 이상 어르신과 장애인 고용으로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취지였다. 계속적인 적자와 부족한 인력으로 난관을 거듭했다.

“외부에서 참 많이 도와주었는데 1년 반 만에 사업을 거두었습니다. 책임자인 제가 능력이 없어서인가 싶네요. 참 많이 괴로웠고 지금까지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경험을 통해 무작정 돕는다고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달은 계기가 됐다.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입니다.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봉사와 공부를 하면서 현실과 다른 것을 깨달았고 좀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구가 고향인 김 원장은 2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대문 밖 거지도 집으로 들여 밥상을 차려준 분이셨다. 일가친척 중에 김원장의 집을 안 거쳐 간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넉넉한 인심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나이가 들어서 깨달았다. “우리 식구만 밥 좀 먹자”고 둘째 언니가 푸념을 할 정도였다. 김 원장은 부모님을 통해 자연스레 봉사정신을 배웠다.

“어릴 적에 국자 뽑기를 잘 했어요. 별 모양을 잘 따서 몇 번이나 공짜로 하곤 했지요. 어느 날 반 친구가 국자아주머니 옆에 있는 것을 보았어요. 친구 어머니였지요. 몇 번이나 공짜로 할 수 있었지만 친구가 부끄러워할까봐 얼른 돌아서 나왔어요.”

별 것도 아니지만 김 원장은 어린 나이에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가슴에 있었다.

◇ 월급 받지만 적자 메우느라 늘 ‘무보수’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말 못 할 아픔 하나쯤은 가슴에 박고 산다. 30세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30세에 맞은 불운은 그녀를 집안에 가두었다. 세상과 점점 멀어졌다. 건강도 나빠졌다. 감기에 걸리면 몇 달씩 누워 있었다.

40대 즈음, 성당을 찾으면서 자신을 발견했고 봉사를 시작했다. 건강도 되찾았다. 어려운 사람, 사각지대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마음으로 봉사를 하고 나면 힘이 샘솟았다.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고무되었다. 그저 기쁨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봉사를 하면서 아픔도 함께 왔다.

“주변의 비아냥거림과 노력하지 않고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로 인해 회의가 들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허물이 있더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김 원장은 2008년 요양원을 시작하면서 원장 월급을 가져간 적이 없었다. 작년부터 월급을 받고 있지만 적자라서 도로 메우기에 바쁘다. 치매어르신들께 욕을 먹으면서도 행복하다. 남다른 인생 역정이 경계를 넘어선 강한 인상을 준다.

“무료급식 때 가장 힘 든 일은 밥 푸는 일입니다. 팔 힘이 세야 하거든요. 저는 밥 푸는 걸 제일 잘 하는 여자입니다. 무엇보다 건강관리 잘해서 봉사하는 행복을 죽을 때까지 이어가고 싶습니다!”

강은주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김교정 대구한국일보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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