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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한일 격차 600년, (9) 주목할 일곱 무사

입력
2019.01.11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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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다룬 일곱 개 이슈에서 한일 격차의 생성 및 확대에의 기여도가 높고 근대 일본을 열강의 일원으로 이끄는 등 선구자적인 역할로 주목을 끄는 일본측 일곱 무사의 활약을 살펴본다.

리더층의 세계관에선 시리즈 1에서 거명된 오다 노부나가(1534),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보다 앞선 시대의 아시카가 요시미쓰(1358)다. 무로마치 막부 3대 장군인 그는 막부 발족 후 58년간 이어진 내정 혼란의 주 원인인 왕실 내 두 조정을 화(和) 정신에 입각한 절묘한 중재안으로 통합한다. 그리고 명 조공으로 얻은 무역 특권으로 재정 기반을 강화해 노, 교겐 등 공연극, 녹원사 곧 금각사 등 역사적 건축물로 유명한 교토 북산 문화를 발흥시켜 문화 역사의 품격을 높인다. 또 명의 앞선 수리 기술을 수용해 농업생산성도 키운다.

차별적 신분제 타파와 빠르고 강한 개혁에선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신 정부를 세운 사이고 다카모리(1828)와 오쿠보 도시미치(1830)다. 사쓰마번 하급무사 출신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힘을 합쳐 700년 만의 왕정복고에 성공한다. 주 무기는 사이고가 포용력의 덕과 군사력이라면 오쿠보는 강한 지적 호기심과 냉철한 기획ㆍ추진 력이다. 둘은 시리즈 3에 나온 7인보다 뒷 시대 인물로 일본의 근대 초기 개혁을 주도한다. 번의 군 지휘와 대외교섭의 전권을 얻은 둘은 다른 유력 번과의 합종연횡으로 막부 타도 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자세로 서구의 신 질서와 제도 도입을 선도한다.

상공인 우대에선 낙시낙좌(樂市樂座)를 통한 상행위 자유화와 세부담 완화, 주요 길목의 관소 폐쇄를 통한 통행세 폐지, 도로 정비 등으로 경제를 활성화한 노부나가다. 그는 이들 조치로 성하마을의 인가받은 소수 특권 상인, 또 이들과 통행인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무가 못지 않은 힘을 지닌 공가와 절ㆍ신사 세력을 견제한다. 늘어난 세수입으로는 천하 포무(布武) 즉 강한 상비군에 기반한 순수 무가정권의 수립을 지향한다. 특히 국내외 교역의 중심지인 사카이, 수운과 물류가 활발한 오쓰, 구사쓰에 대관을 두어 직할 관장하고 관세 징수를 강화한다. 나아가 주요 가도의 도폭을 1.8~2m에서 6.5m로 넓히고 가로수도 심어 이동과 유통의 편의를 도모한다.

민생 우선에선 평화 기조 하에 경제적 번영과 서민 문화 창달의 틀을 짠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다. 그는 요시미쓰 이상의 호대희공형 인물로 강한 호기심에 끌린 왕성한 교류로 서양의 정보ㆍ지식에 밝았다. 무력에 기대어 권좌에 오른 그였지만 평화속의 공생이 싸워 이기는 것보다 중요함을 터득하여, 세계 굴지의 무력을 스스로 버리고 유학 이념 하의 평화와 학문 숭상의 체제를 구축한다. 후대 장군들이 그의 유지를 따르면서 문맹률이 낮아지고 공연극, 각종 소설, 판화 등 서민 문화가 발달한다. 그 결과 개화기 일본을 찾은 서양인들은 높은 독서열과 발달한 출판문화에 꽤 놀란다.

분권과 공익 추구에선 최초 무인정권인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1147)와 3대 집권 호조 야스토키(1183)다. 요리토모는 교토 왕실과 공가 세력의 영향력을 경계하여 500㎞ 동쪽의 가마쿠라에 막부를 차려 각지의 유력 무인과 주종 관계를 맺고 해당 지방의 지배를 허용하는 분권제 정치를 도입하여 그때까지의 중앙집권제를 일신한다.

야스토키는 시리즈 7에서 거론된 요시미쓰와 도쿠가와 요시무네보다 앞 시대 인물로, 그가 제정한 어성패식목(1232)은 통치 질서 확립과 공익 추구가 주 목적인 무사 및 서민 대상의 윤리규범이자 민형사 법제다. 이후 분권 통치의 기틀이 잡히고 지방이 다양성을 인정받으며 경쟁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발전한다. 백성이 넨구 즉 세금의 납부자임을 아는 각지의 무사들은 넨구를 내지 않는 천민ㆍ노예를 최소화하고 백성의 눈높이를 의식하여 착취 행위를 자제한다. 분권 통치기에 일본은 중앙집권제의 고려를 한 발 앞선다.

사이고와 오쿠보 등이 주도한 메이지 유신은 근대 일본의 출발점이자 성공한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후 들어선 중앙집권 정부가 군국주의 침략 노선을 강화하다 망하자 연합국 점령군은 지방자치 도입 등 구 막부의 분권제로 부분 회귀한다. 근자에 유신이 77년 후 패망이라는 실격의 역사를 잉태한 게 필연이었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그 의의가 재해석되고 있다.

끝으로 우리 역사에선 세종ㆍ이순신 등을 제외하고 7인 수준으로 평가 받는 이가 많지 않다는 시각이 있다. 배경엔 평가에 인색한 풍토 외에 사대주의 이념하의 중앙집권제에서 열린 세계관과 포용성을 지닌 왕 등 리더가 배출되기 힘들고, 당대 업적이 후대에까지 직·간접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퇴색된 점 등이 있다. 고려와 조선에선 왕의 친인척이나 유력 권신 등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여 큰 뜻을 가진 인재가 리더로 크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눈을 돌려 오늘의 정치ㆍ인사 풍토와 관행을 보면 얼마나 달라졌을까.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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