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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남의 일기장을 보면 크게 혼난다

입력
2019.01.1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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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 한 학년 학생들이 모두 운동장에 모여 일종의 약식 반대항 체육 대회를 하곤 했다.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 교실에 남아 자습을 했다. 평소 거의 말도 섞어보지 않은 여학생도 남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창가에 앉아 멍하니 계주 시합을 보다가 문득 담임 선생님이 검사를 마친 일기장들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슬금슬금 평소 맘에 두고 있던 친구의 일기장을 뒤적였다. 몇 장을 넘기다 보니 같은 반 남학생이 그 친구에게 애정 고백을 한 내용이 나왔다. 오, 이것 봐라. 남의 일기장 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남아있던 친구를 흘깃 봤지만 계속 엎드려 있는 걸 보고 다른 여학생 일기장들도 뒤지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누구랑 친한지 등등 다양한 정보가 있었다. 어지간히 보고 나서 자리로 돌아와 시치미를 떼고 앉았다.

타인의 내밀한 속사정을 몰래 들여다본 행위는 곧 응징을 받았다. 담임 선생님께 매타작을 당하고, 일기장 속 내용은 함구하기로 했다. 일기를 훔쳐보는 걸 함께 남아 있던 여학생이 보고 선생님께 고했던 모양이다. 본래 남들 뒷얘기, 속사정을 안다는 건 재미있었지만 대가가 뒤따른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일이야 체벌을 받고 끝나는 선에서 정리가 됐지만, 국가기관이 개인의 내밀한 정보를 근거 없이 수집하는 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다. ‘사찰(査察)’이라는 말은 본래 조사하여 살핀다는 뜻이지만,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법적 근거 없이, 공익이나 보안 등의 목적이 아닌 권력과의 야합을 위해 민간인 정보를 모을 때 ‘사찰’이라는 용어를 쓰곤 하는 것도 일정 부분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가진 쪽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의 동향을 파악해 왔다. 특히나 정당하지 않은 권력일수록 ‘어둠 속에서 얻은 정보’를 유용하게 활용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우리 현대사만 해도 이 같은 일이 비일비재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경찰이나 국가정보원, 기무사 등이 반정부 인사 감시나 민간인 사찰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는 정권 유지에 악용되곤 했다.

최근에도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이 드러나 문제가 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동영상을 게시했다는 이유로 사찰 대상이 된 피해자는 직장을 잃고 재산적 피해까지 입었다. 결국, 장진수 전 주무관의 폭로로 이어졌고 사찰을 지시하고 보고한 관계자들은 형사처벌까지 받게 됐다.

박근혜 정부도 정보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비판론이 거세지면서부터 기무사 대원들은 유가족들의 정치 성향을 파악해 분류했다. 각 피해자 가족들의 경제 사정, 말 못할 고충과 관심사항 등 사생활 동향 정보까지 수집됐다. 지방선거 및 보궐선거를 앞두고서는 여론을 파악한 뒤 각종 선거 대비 방안 등을 마련하고 실행하기까지 했다. 보안과 방첩을 위해 설치된 기무사가 민간인을 상대로 정보 수집을 하고 정치에 관여한 것이다.

경찰도 치안을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정보를 수합하고 있지만, 각 지역구 선거에 누가 출마하는지, 지지도가 어찌 되는지 하는 정보도 모았다. 치안과 정치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늦긴 했지만 과거 폐습에 대한 반성적 고려에서 법령 등을 정비해 정보기관, 특히 국정원이나 기무사의 정부 수집 대상을 제한한 것은 다행스럽다. 수사 도중 전직 기무사령관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유감이지만, 권력의 민간 정보 수집 제한은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김태우 수사관이 제기한 청와대 민간인 사찰 의혹이 사실인지 여부는 검찰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겠지만, 그와 별개로 권력기관의 정보 수집 대상과 범위 등에 대해 명확한 원칙이 세워지고 또 지켜져야 한다. 남의 일기장을 보면 반드시 크게 혼나야 한다.

안아람 사회부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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