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영화의 강점은 섬세한 심리 묘사라고 생각해요. 이번 영화의 섬세한 감성을 제대로 평가해 주실 분들이 바로 한국 관객이 아닐까 기대하고 있어요. 영화 보러 많이 와주실 거죠?”
두근두근 설레는 표정을 보니 홍보성 발언만은 아닌 듯싶다. 꼬박 9년 만의 재회. 그도, 한국 팬들도, 오래 기다렸다. 일본 톱배우 쓰마부키 사토시(39)가 새 영화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17일 개봉)으로 한국을 찾았다. 8일 서울 소공동 한 호텔에서 마주한 쓰마부키는 “예전엔 셀 수도 없이 한국에 자주 왔는데 최근엔 뜻하지 않게 공백기가 길었다”며 “언제나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한국 팬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일본 열도를 뒤흔든 일가족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기자 다나카(쓰마부키 사토시)의 이야기다.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나오키상 후보에도 올랐던 동명 추리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을 재미있게 읽은 쓰마부키는 시나리오가 완성되기도 전에 출연을 결심했다. “사람들은 자기 입맛대로 타인을 규정하곤 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가진 선입견이 단숨에 무너지는 경험을 했어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기도 했죠.”
영화는 다나카의 시선을 빌려 심연 너머 진실을 들여다본다. 다나카는 살인사건 피해자의 주변인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 속 파편들을 맞춰 나간다. 이성적 추리보다 냉소적 관찰을 택한 영화적 문법을 쓰마부키는 매우 섬세하게 표현한다.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러나 매 순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영화 속 그의 무기력한 얼굴이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 연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표정과 대사에 의미를 담으려고 하면 그야말로 ‘대사’가 돼 버리니까요. 저도 모르게 배어 있던 연기 습관들을 최대한 덜어내려 노력했어요. 다나카라는 사람의 인생 한 단락을 보여준다는 느낌으로 연기했습니다.”

아동 학대 혐의로 수감된 여동생 미쓰코(미쓰시마 히카리)의 비밀은 다나카의 취재기와 교차되며 진실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고, 이윽고 드러나는 충격적 반전은 예리한 칼날에 베인 듯 섬뜩하다. 쓰마부키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위선자라 생각하지 않지만 무의식 중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며 “극중 인물들은 그런 점에서 모두 죄를 저지른 셈”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선 상류 사회를 혐오하면서 또한 동경하는 인간의 이중성과 계급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도 엿보인다. 한국과도 교감할 수 있는 지점이다. 쓰마부키는 “여전히 계급은 존재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도 존재할 것”이라며 “감독의 연출 의도에 따라서 그런 문제의식도 담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쓰마부키의 최근 필모그래피에선 사회성 짙은 작품들이 유독 눈에 띈다. 재일동포 이상일 감독의 ‘분노’(2016)와 ‘악인’(2010)도 일본 사회의 그늘을 들여다본 작품이다. 배우의 사회적 영향력과 책임감을 고민한 결과일까. “글쎄요… 다만 ‘안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분노’에서 게이를 연기하면서 성소수자의 세계를 알게 됐고 이해하게 됐어요. 그들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고 차별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저도 예전에는 성소수자들을 조금 불편해했지만, 게이 친구를 사귀면서 제 안에 새로운 인식이 싹텄어요. 어떠한 대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 같아요.”

쓰마부키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배우 하정우와 영화 ‘보트’(2009)를 찍기도 했다. 둘은 서로 “형 동생”으로 부른다. 이번 방문길에 하정우를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는데 하정우가 바빠서 약속이 무산됐다고 한다. “모바일 메신저 아이디를 서로 교환했는데 제가 휴대폰이 바뀌면서 모두 날아갔어요. 지인에게 새 아이디를 정우 형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직 연결이 안 되고 있어요. 흠… 왜일까요. 하하.” 그의 넉살에 인터뷰실에 폭소가 터졌다.
쓰마부키는 하정우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다. “제가 속마음을 터놓는 외국 친구가 생긴 게 정우 형이 처음이에요. 영화를 함께 찍은 지 10년이 지났는데, 10년 전 저에게 없던 얼굴을 형에게 보여주고 싶고, 형이 어떤 배우가 됐는지 제 눈으로 보고 싶어요.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형제 역할 어떨까요. ‘보트’ 같은 버디무비도 좋고요.”
쓰마부키는 영화 ‘워터보이즈’(2001)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2) ‘식스티나인’(2004) ‘눈물이 주룩주룩’(2006) 등으로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일본 영화 붐을 일으켰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에선 매력적인 청춘 배우에서 묵직한 연기파 배우로 성장한 그를 확인할 수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찍었던 20대 초반엔 영화 일을 한다는 게 마냥 행복했어요. 20대 후반엔 그 경험에 얽매여서 조금 오만하기도 했죠. 그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30대가 되니 여유로워요. 좀 유치하면 어떤가요. 흐름에 몸을 맡기고 연기하는 게 즐겁고 편안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