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사회서 공감사회로-<3> 방관이 갈등 키웠다]
혐오차별대응기획단 출범 앞두고 근거 법률 없다 보니 실효성 의문
文대통령 ‘차별금지법 제정’ 약속… “사회적 합의 필요” 한발 후퇴
“평등한 세상에 나중은 없다.”
만년 ‘2등 시민’이었던 여성, 성 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등의 외침이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대접받겠다는 어쩌면 당연한 요구다. 그러나 “병력, 출신 국가, 언어,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성적지향, 학력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자”는 당위까지 보류당하고 마는 게 현실이다.(2007년 법무부가 이 같은 7개 차별 사유를 삭제한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한 적 있다) 우리 사회 갈등과 혐오의 양상은 커지고 있는데 국가는 손을 놓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다.
혐오ㆍ차별에 칼 빼든 인권위, 순항할까
어느 때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어깨가 무겁다. 보수정부 아래서 사실상 명맥만 유지해오던 인권위가 최근 국가인권전담기구로서의 위상 회복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9월 최영애 인권위원장이 취임하면서다. 그는 특히 혐오와 차별 문제에 칼을 벼리고 있다. 올해 신년사에서 밝혔듯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여성, 노인, 성 소수자, 이주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문제에 정면 대응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는 문제의식에서다. 그 첫걸음이 혐오차별대응기획단 출범이다. 인권위 관계자는 “그동안 노인 혐오는 사회인권과, 여성 혐오는 성차별시정팀 등 각 과에서 개별적으로 처리해왔다”라며 “앞으로는 차별시정국장이 단장으로 하는 기획단에서 대응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르면 이달 말 출범하는 기획단은 성별, 장애, 나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하는 혐오표현의 유형과 판단 기준, 예방 조치 등에 관한 지침을 제시ㆍ권고하고, 실태조사와 교육 및 홍보 활동을 통해 혐오표현에 맞설 방침이다.
인권위의 책임 있는 역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지만 창궐하는 혐오와 차별에 실효성 있는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다. 인권위 관계자도 “명확한 근거 법률이 없다 보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할 정도다. 차별이 무엇이고, 어떻게 구제해야 한다는 내용이 총체적으로 담긴 기본법조차 없는 탓이다. 인권위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직법,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만 차별이 무엇인지 한 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혐오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인권위가 의지만 갖고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지금보다 많다”라며 인권위의 전향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높다. 하지만 인권위로서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기본법 없이는 언제라도 “실정법을 너무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인권위에만 맡길 일도 아니다. 결국 평등에 대한 기본법, 즉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데로 논의의 초점이 모아진다.
조혜인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평등권을 잘 실현하기 위한 정책과 개별법을 아우르는 기본법을 만드는 건 국가의 책무”라며 “그 법에 따라 차별이 무엇인지 구체적 사례를 만들어내고 차별의 현실을 개선해 나가는 게 인권위의 역할이다”고 강조했다.
지금 꼭 필요한 기본법,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은 사회적 소수자가 고용, 교육, 서비스의 이용 등에서 차별을 겪을 때 피해를 구제하도록 하는 기본법적 성격을 갖는다. 지금도 남녀고용평등법, 기간제법, 연령차별금지법 등 차별 금지를 규정한 개별법들이 있다. 하지만 고용 영역에만 한정돼 차별 구제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난민인 장애인, 고령의 여성노동자처럼 한 사람의 정체성이 단일하지 않은 만큼 중첩된 차별과 혐오를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다. 반면 차별금지법은 현행 인권위법에는 빠져있는 간접차별과 괴롭힘도 차별로 규정해 변화된 사회 갈등상까지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차별금지법은 기본법으로서의 상징성이 크다. 국내 최초로 혐오표현 관련 실태조사를 실시한 2016년 인권위의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책임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한국은 차별이 금지된 나라인가라는 물음에 현재는 명시적으로 무엇에 의해 금지된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라며 “차별을 금지한다는 국가의 의지를 확인하고, 사회 전반에 혐오ㆍ차별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근거법이 된다는 차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안은 10년이 넘도록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뒷짐만 지고 있어서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2002년 참여정부의 공약으로부터 비롯됐다. 박근혜 정부도 국정과제로 꼽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18대 대선 때는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2017년 대선 때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한발 물러섰다.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자진 철회하는 촌극까지 빚었다. 이렇다 보니 시민사회단체는 “법 제정이 미뤄지면서 오히려 차별해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장되고 있다”고 꼬집는다.
조 변호사는 “차별행위는 개인의 악의보다 사회의 편견, 고정관념, 구조적 차별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라며 “개인을 찍어 형사 처벌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사례마다 차별 중지나 시정 조치, 재발 방지 조치, 교육과 훈련 등 다양한 조치를 통해 예방하고 개선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은 그래서 지금 당장 꼭 필요한 법이다”고 단언했다.
권영은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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