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누나가 결혼했다. 다행스럽게도 결혼과 함께 신혼 집을 마련해 독립했다.
한달 반 정도, 집안에 한 명이 없는 생활이 이어졌으나 원래부터 가족들이 ‘저마다의 시간’으로 생활해왔고, 또 누나도 이미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이라 집안의 분위기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 되려 더 생소하게 느껴졌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집안 내에서 ‘결혼할 사람’으로 홀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혼 이후 친인척들을 만날 때마다 ‘결혼해야지’라는 이야기가 여느 때보다 더 명확하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내용은 간결했다. 결혼 직전부터 신혼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집에는 누나의 짐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책방을 따로 둘 정도로 책 욕심이 많은 집 분위기에, 누나 또한 책을 좋아하는 편이고 또 업무를 위한 자료 수집을 위해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결혼 전부터 ‘책과 책장’을 옮기는 것에 대해 많이 고민을 했고, 또 신혼 집에 ‘모두 둘 수 없다’라는 판단이 있어 ‘시간 날 때마다 필요한 책을 조금씩’ 옮기고 있었던 차였다. 그리고 이번에 추가로 책을 옮기고, 또 책장도 하나 옮겨 달라는 것이었다.
넉넉한 여유를 과시하는 파일럿들
사실 파일럿은 전통적으로 넉넉한 공간을 자랑해온 차량이었다. 지난 2002년, 어코드의 차체를 기반으로 하여 처음 데뷔한 1세대 파일럿부터 이러한 특성은 꾸준히 이어져왔다. 아무래도 미국 시장을 고려한 차량이고, 또 3열 SUV라는 특성을 갖춘 덕에 ‘모든 파일럿’들은 여유롭고 또 넉넉했다.
실제 초대 파일럿의 경우에도 2열과 3열 시트를 모두 폴딩하면 2,557L의 적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당대 데뷔한 SUV들과 비교를 하더라도 상위권에 포진한 수치다. 이러한 배경에는 ‘혼다의 능숙한 패키징’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세대 파일럿 또한 마찬가지다. 초대에 비해 차체 안전은 물론이고 차량의 성향이 변화되는 바람에 적재 공간은 2,463L로 소폭 줄긴 했지만 2열 시트와 3열 시트를 모두 접었을 때 누릴 수 있는 만족감은 정말 대단했다. 게다가 박시한 차량의 디자인과 트렁크 공간의 구성 덕분에 부피가 큰 짐도 손쉽게 적재할 수 있는 그런 차량이었다.
그리고 이번 3세대 또한 넉넉한 공간을 누리게 되었다.
사실 초대 파일럿과 현재의 3세대 파일럿의 경우 적재 공간에 대한 측정 방식, 기준이 조금 다르기에 1:1 비교는 어렵겠지만 2376L에 이르는 적재 공간이 확보된 상태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측정 방식에 따라 최대 3,000L가 넘는 적재 공간으로 표기하기도 하니 그 광활함이 상당한 수준이다.
파일럿을 깨우다
누나의 연락을 받고, 함께 누나 방의 짐 정리를 도왔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해 익일 촬영을 위해 지하 주차장에 주차해둔 파일럿을 깨웠다. 이번에 시승하게 된 파일럿은 7인승 사양의 파일럿 엘리트 모델로 2+2+3의 시트 바리에이션을 갖춘 차량이었다.
기존의 파일럿 대비 달라진 점은 크지 않지만 9단 변속기와 버튼식 기어 시프트 시스템을 탑재한 점과 오딧세이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던 캐빈토크가 추가된 것이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국내 SUV 시장에서 익스플로러의 기세에 다소 눌려있지만 차량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다.
트렁크를 열고, 3열 시트와 2열 시트 일부를 폴딩하고 짐을 싣기 시작했다. 2m에 육박하던 책장도 분해하여 파일럿의 트렁크에 손쉽게 적재 되었다. 그리고 무거운 서적들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물론 책을 싣는다고 차량에 부담이 갈 이유는 없다.
어차피 파일럿의 적재 및 견인 능력 자체가 워낙 뛰어난 편이라 책을 좀 적재 한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수준이니 마음 놓고 적재했다. 그렇게 한참을 적재한 후 살펴보니 아직 적재 공간이 넉넉했다. 누나와 함께 짐을 조금 더 갖고 내려올걸 그랬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트렁크를 닫고 누나의 신혼 집으로 출발했다.
V6 엔진의 당위성
경재 모델들이 다운사이징 터보 엔진을 탑재하는 상황이지만 혼다 뉴 파일럿은 여전히 V6 엔진을 탑재했다. 최근의 엔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SOHC 구조를 갖춘 V6 3.5L i-VTEC 엔진이 자리한다. 이 엔진은 최고 출력 284마력과 36.2kg.m의 풍부한 토크를 선사한다.
V6 엔진 자체는 매력적이지만 시대의 트렌드와 다른 건 사실이다. 그렇기에 ‘왜 혼다는 여전히 V6 엔진을 탑재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는 파일럿의 특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일럿은 말 그대로 많은 짐과 많은 사람과 함께 달리는 차량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드러운 출력의 전개가 필요하다. 차량의 과도할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인다면 적재된 짐이나 탑승자가 불안감을 느낄 수 밖에 없고, 자칫하다간 적재된 짐들이 파손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량의 셋업 자체도 되도록 부드럽게 조율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혼다 뉴 파일럿은 목적이 집중하며 이러한 조율 방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혼다는 이미 완성도 높은 2.0L 터보 엔진까지 갖고 있으니 ‘이유가 있는 선택’이 확실한 것이다.
여기에 i-VTM4 또한 매력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체격이 큰 차량, 그리고 적재 및 다수의 인원을 고려하는 차량은 부드러운 움직임이 늘 최우선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i-VTM4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드럽고 여유로운 트랙션 배분을 자랑한다. 주행 상황이나 조향 상황에 따라 빠르게 네 바퀴의 구동력을 섬세하게 조율하며 급작스러운 출력 전개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탁월한 모습을 선보였다. 실제 누나의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잦은 코너를 돌아나가더라도 차량은 늘 부드럽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릿지라인 그리고 파일럿
한편 이러한 차량에 대한 내구성이나 기능의 지속성에 우려를 갖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일럿은 2017 북미 올해의 트럭에 선정된 ‘릿지라인’의 기반 모델이다. 견고한 차체와 오프로드 및 견인력 등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그릇’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그 동안 국내 시장에서 혼다 파일럿의 존재감이 그리 크지 못했다. 특히 디젤 SUV가 유행인 가운데, 포드 익스플로러에 기가 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잘 만든 가솔린 SUV’는 충분히 시장의 이목을 끌 가치가 있으며 북미 시장에서는 그 존재감을 꾸준히 선사하고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다 파일럿’의 명성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한국일보 모클팀 – 김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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