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유해진, 윤계상
조선말 사전 만들다 탄압받은
일제말 조선어학회 사건 모티브
배우 유해진(49)과 윤계상(41)이 ‘말’과 ‘마음’을 모아 영화 ‘말모이’(9일 개봉)를 내놓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말 사전을 만든다는 이유로 탄압받은 조선어학회 사건을 모티브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뜻을 모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은 까막눈 판수(유해진)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 판수는 아들 학비 때문에 정환의 가방을 훔쳤다가 조선어학회에서 심부름 일을 하게 되고 난생처음 글을 배운다. 판수를 못마땅해하던 정환은 사전 편찬에 힘을 보태는 판수를 보며 말모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택시운전사’ 시나리오를 쓴 엄유나 감독의 연출 데뷔작. 유해진과 윤계상은 2015년 ‘소수의견’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최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두 배우를 만났다.
◇유해진 “내 사전에 담고 싶은 단어는…”
“감독한테 따로 불려간 적도 없는데, 언제 나를 그렇게 꼼꼼히 본 거지….” 배우 유해진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농담을 던지더니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엄유나 감독이 판수 역에 유해진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썼다는 얘기에 돌아온 답변이었다. 칭찬이 머쓱한지 그는 “아무래도 내 외모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겠냐”는 엉뚱한 너스레로 말길을 돌렸다.
유해진이 이 영화를 택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웃음과 감동 이전에 어떤 끌림 같은 게 있었어요. 아주 투박한 매력이죠. ‘택시운전사’와 ‘1987’(2017)에서도 경험했듯이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큰일을 이뤄냈다는 것, 나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런 과정을 거쳐 말과 글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는 게 참 좋았어요.”
감칠맛 나는 코미디와 묵직한 드라마가 유해진의 연기로 빚어진다. 홀로 어린 남매를 키우며 먹고 사는 데 급급했던 판수는 글을 배우면서 소중한 가치에 눈을 뜬다. 판수가 길거리 상점 간판을 읽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은은한 감동을 준다. 판수의 성장과 변화는 곧 관객의 각성으로 이어진다. 유해진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시장에 가면서 간판을 읽었던 기억, 이웃에 살던 동네 욕쟁이 아저씨를 판수 캐릭터에 참고했다”고 말했다.
“돈을 모아야지, 말을 모아서 어디다 쓰냐”고 하던 판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전 편찬에 참여한다. 조선어학회가 10여년간 모은 우리말 원고를 일본 경찰에게 빼앗기는 장면에서는 유해진도 쉽사리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는 “모든 배우들이 촬영을 마치고도 한동안 침묵에 빠질 정도였다”며 “연기인데도 이렇게 참담한데 이 일을 실제로 겪었던 분들은 어떠했을지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유해진’을 지우려고 애썼다.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고와 희생이 있었는지 제대로 전달하고 느끼게 하려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릭터에 동화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그는 “더 보여줄 유해진이 뭐가 있겠냐”는 얘기도 했다.
유해진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는 대사를 지금도 소중히 품고 있다. 판수와 정환이 마음을 터놓고 서로를 부르던 “동지”라는 말도 벅차게 떠올렸다. 그는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함께 만들어 간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고 그런 촬영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서로 흠모하는 사이인 윤계상과도 그랬다. “이렇게 관계가 끈끈해지는구나, 이런 게 동지라는 것이구나 느꼈죠. 점점 더 계상이가 좋아집니다(웃음).”
유해진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대형서점에 들러 큼지막한 국어사전을 샀다. “몇 번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양심의 짐은 덜었다”며 그가 웃었다. 만약 유해진만의 ‘말모이 사전’을 만든다면 그는 어떤 말을 담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녹록하지 않은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내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 말을 꼭 담고 싶네요.”
◇윤계상 “지독한 연기, 왜 재밌을까”
“이런 역사를 나는 왜 지금껏 몰랐을까, 가슴이 몹시 아팠어요. 무슨 역할이든 하고 싶었고,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배우 윤계상이 이렇게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몸 바쳐 우리말을 지킨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제 보니 ‘말모이’가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은 말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사전 편찬에 삶을 바친다. 언뜻 전형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연기 난이도가 높다. 윤계상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제 대사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오’ 같은 문어체가 많았어요. 편한 말투로 바꾸니 정환의 꼿꼿함이 사라지더군요. 결국 시나리오를 따랐는데 어색하진 않았나요?”
기대 이상으로 자신의 몫을 해내면서도 자책이 앞서는 그가 유일하게 “잘했다”고 자평한 건 ‘감정을 절제한 연기’다. “정환은 감정을 참고 감춤으로써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캐릭터”라 해석하고, 그 힘으로 영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유해진도 언급했던, 말모이 원고를 빼앗긴 장면에선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영화에는 뒷모습만 나왔지만 앞에선 오열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나 힘들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려 있던 정환은 까막눈 판수를 만나면서 ‘우리’라는 의미를 깨닫고 한층 성장한다. 윤계상은 자신을 투영했다. “연기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힘들어했던 적이 있어요. 첫 악역을 연기했던 ‘범죄도시’(2017)가 저를 바꿨죠. 완전한 하나의 팀처럼 함께 만들어 가는 놀라운 경험을 했어요.”
‘말모이’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윤계상은 “배우들이 치열하게 소통하면서 한 장면 한 장면 완성했다”며 “연기가 지독하게 어려운데도 이런 재미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윤계상이 존경해마지 않는 유해진이 있었다. “해진이형이 캐스팅됐다는 얘기에 무조건 출연하겠다고 했어요. 제가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분이에요. 정환이 판수와 갈등할 때도 눈에선 막 하트가 나오지 않던가요(웃음). 다음 작품에서도 만나고 싶은데, 그때도 꼭 같은 편, 같은 팀이었으면 좋겠어요.”
2004년 영화 ‘발레교습소’로 연기를 시작해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그룹 god의 멤버로 지낸 시간보다 길다. 윤계상은 “한때 미친 듯이 예민했고 나를 증명해 보이겠다며 자만하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그 중심엔 절실함과 진성성이 있었다”고 했다. 이런 그가 새삼 떠올리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발레교습소’를 준비하며 3개월간 댄스 연습실에서 살았어요. god를 막 나왔을 때였는데 많은 분들이 저를 챙겨주셨어요. 어느날 뒤풀이로 맥주를 마시다가 울어버렸어요. 보살핌을 받는 게 고마워서요. 그때 그 마음 때문에 지금도 연기하는 것 같아요.”
윤계상은 매 작품 성장하고 있다. 그는 “경험이 쌓이면서 변해가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영광은 찰나이지만 내 안에 담기는 건 영원해요. 차곡차곡 잘 쌓아가고 싶어요. 인생 길잖아요(웃음).”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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