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세상]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도덕’과 ‘정의’ 같은 어휘가 ‘경제’에게 희롱 당하는 시대다. 도덕, 정의 따위 외치다가 경제 다 망가진다고 말해야 뭔가 무식한 대중들에 함부로 부화뇌동하지 않는, 남다른 시각을 지닌 고고한 프로페셔널 같은 느낌을 주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이런 바보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진정한 부는 ‘도덕 경영’에서 나온다고 외친, 일본 경제의 전설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의 자서전 ‘비 오는 날 밤의 이야기’(雨夜譚ㆍ아마요가타리)다. 손주들에게 여러 밤에 걸쳐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유품’ 삼아 들려주는 방식이라 이런 은은한 제목이 나왔다. 한국 번역본 제목은 조금은 딱딱한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다.
‘전설’ 혹은 ‘설계자’란 표현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간토 평야 부농 집안에서 태어난 시부사와는 도쿠가와 가문 마지막 쇼군의 가신에서 메이지 정부 대장성 개정국장으로 변신한 뒤 서른 셋의 나이에 경영계에 투신한다. 이후 50여년간 오사카방적과 삿포로맥주, 제일국립은행, 도쿄전력, 제국호텔, 도쿄제철 등 무려 500여개 기업을 직접 세우거나, 세우는 데 관여했다. 인재 양성을 위해 일본여대 등 수많은 대학 설립 작업도 주도했다. 여든 살이 넘어서도 일본방송협회, 일본항공수송회사 창립을 이끌었다. 그뿐 아니다. 보육원, 병원 등 공익기관도 수 백 개 만들었다. 이 정도면 일본 경제의 ‘전설’, ‘설계자’, ‘왕’, ‘아버지’, ‘창시자’ 무슨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시부사와가 들고 있는 책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같은 게 아니라 공자의 ‘논어’라는 점이 좀 놀랍다. 한국에서 유학은 상업을 철저히 억압해 사실상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의 이익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면, 시부사와는 전혀 다른 관점을 취한다.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 지음ㆍ박훈 역주
21세기북스 발행ㆍ268쪽ㆍ1만8,000원
가장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게 논어 태백편 13장 해석이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 가난하면서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은 수치이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된다.” 이 구절을 두고 유학자들은 ‘나라의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집중하고, 그래서 자신의 지위가 낮고 돈이 없는 것은 내가 못 나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 도가 없어서 그렇다는 식의 정신승리법을 구사할 적에, 시부사와는 이 구절을 “그렇다면 돈 벌고 출세한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네”라고 읽어낸다.
이건 ‘논어의 자기계발서화’일까, 아니면 프로테스탄티즘에다 자본주의를 가져다 붙인 것과 같은 ‘막스 베버의 일본화’일까. 이런 스토리들은 책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으로 더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이전 시기,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경영 활동에 나서기 전까지 시부사와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두 가지가 눈에 띈다.
하나는 ‘의협(義俠)’ 청년의 모습이다. 시부사와의 젊은 시절은 격동기였다. 막부가 끝나고 일왕 체제가 들어서면서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고 근대화에 총력을 기울일 때다. 신분제가 엄격한 일본 사회임에도 이런 혼란 속에서 시부사와는 농민 주제에 감히 혁명을 꿈꿨다. 그가 생각해낸 혁명 방식은 ‘요코하마 폭파 음모’. 음모의 내용은 이렇다. 일단 적당히 적은 규모의 다이묘 하나 털어서 병력을 갖춘다. 이 병력으로 외국인이 많은 개항장 요코하마를 타격하면, 자국민 보호를 내세운 외국 세력들이 일본에 개입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것이란 시나리오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다. 하찮은 농민 신분인 자신이 그렇게 죽어버리고 나면, 훌륭하신 분들이 뒤따라 나와 나라를 잘 이끌 것이라 믿었다.
젊은 혈기만 넘치는, 뭔 되지도 않을 소리인가 싶은데 시부사와는 집안과 의절하고 돈 모아 무기를 구입하는 등 그 당시에는 정말 진지하게 일을 추진한다. 객기에 가까운 이 의협정신이 의외로 시부사와를 도쿠가와 막부로, 또 메이지 정부 경제관료로 이끄는 시발점이 된다. 시부사와의 선택과 변신은 묘한 아이러니를 준다.
또 하나는 ‘평화’다. 대장성의 신진관료였던 그는 좌충우돌해가면서 화폐, 조세, 회사 등 온갖 법, 제도, 시스템을 만들어가는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곧 그만둘 생각을 한다. 아무리 체제를 갖춰놔도 상업이 너무 부진해 자신이 직접 회사를 만드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군부의 계속되는 군비압박도 걸림돌이었다.
결정타는 대만 문제였다. 근대화로 팽창하기 시작한 일본은 오키나와를 삼킨 뒤 대만을 노렸다. 시부사와는 “지금 일본은 실로 아름다운 듯 하지만 정치를 돌아보면 추호도 정돈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국가는 피폐하고 인민은 궁핍하다”면서 대만 점령이 설혹 성공한다 해도 문제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후에도 시부사와는 군비 축소를 통한 내실 강화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의협과 평화, 일본 경제의 설계자 시부사와의 향후 일생을 결정지은 두 키워드다. 도덕과 정의, 북핵 협상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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