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논담] “파이 쪼그라드는 수축사회… 뺏고 빼앗기는 생존 전투 불가피”

입력
2019.01.03 18:00
수정
2019.01.03 18:40
28면
0 0

 ‘수축사회’ 저자 홍성국 전 대우증권 사장 

 “600년간 이어온 팽창 멈추고 제로섬 지나 파이 축소 국면 

 택시 갈등ㆍ교육ㆍ법조ㆍ의료 등 이미 곳곳서 수축사회 접어들어” 

홍성국(55) 전 대우증권 사장은 30년 증권사 경력 중 20여 년을 리서치 업무에 종사해 ‘증권계의 미래학자’로 불린다. 그는 “파이의 전체 크기가 줄어드는 ‘수축사회’로 진입하면서 전방위 갈등이 제로섬 전쟁 형태로 벌어지고 있다”며 “공권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회가 돌아가는 사회적 자본의 축적과 기득권층의 양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류효진기자
홍성국(55) 전 대우증권 사장은 30년 증권사 경력 중 20여 년을 리서치 업무에 종사해 ‘증권계의 미래학자’로 불린다. 그는 “파이의 전체 크기가 줄어드는 ‘수축사회’로 진입하면서 전방위 갈등이 제로섬 전쟁 형태로 벌어지고 있다”며 “공권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회가 돌아가는 사회적 자본의 축적과 기득권층의 양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류효진기자

절벽사회, 격차사회, 분노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용어들이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저출산ㆍ고령화, 집값 폭등에 따른 주거 불안, 과중한 사교육비, 기술 혁신으로 빠르게 사라져가는 일자리, 중ㆍ장년 세대를 불안에 떨게 하는 퇴출 공포와 노후 빈곤. 이런 불안과 위기의 근본 원인은 뭘까.

홍성국(55) 전 대우증권 사장이 ‘수축사회’라는 책을 선보였다. “세계 경제는 인구 감소와 생산성의 획기적 증대에 따른 공급 과잉, 역사상 최고 수준의 부채, 부의 양극화로 더 이상 성장이 어려운 수축사회로 접어들었다.” 지구촌은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 동안 인구가 늘어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팽창사회였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의 진전으로 인구와 일자리가 감소하고 파이가 줄어드는 수축사회로 변하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 위기와 첨예한 사회적 갈등의 원인도 파이가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위기의 원인을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 탓으로 몰아가는 건 견강부회인 셈이다.

홍 전 사장은 1986년 대우증권에 입사해 리서치 업무를 주로 담당했던 1세대 애널리스트. 세계 및 한국경제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예측해 ‘증권계의 미래학자’로 불린다. 홍 전 사장은 “앞으로 우리가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은 5년밖에 안 남았다”며 “기존 구조가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수축사회’는 인류가 처음 맞닥뜨리는 세상이다. 용어 자체가 끔찍하게 들린다.

“한국과 세계 경제 모두 르네상스 이후 600년 간 줄곧 성장하고 발전하고 팽창해왔다. 지금은 정지(저성장) 상태다. 팽창사회에서 제로섬사회를 지나고 있다. 곧 파이 자체가 축소되는 국면이 온다. 파이가 계속 커질 때는 내 파이도 커지니까 다툴 일이 별로 없었다. 파이 크기가 고정되면서 자신이 더 먹으려면 남의 파이를 빼앗아야 하는 제로섬사회가 됐다. 시간이 지나면 파이가 더 줄어들기 때문에 더 많이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불가피하다. 수축사회 진입은 한국만이 아닌 전 세계적 현상이다. 미중 패권경쟁의 본질도 더 이상 팽창이 어려워지면서 상대방의 파이를 빼앗으려는 생존경쟁으로 봐야 한다.”

- 세상 모든 영역이 수축사회로 가는 건가. 인공지능(AI) 등 팽창하는 산업도 있지 않나.

“택시 자영업 등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는 곳은 대부분 수축사회 영역이다. 교육 법조 의료 등 라이선스 영역도 수축사회로 접어들었다. 산업 또한 섬유 의복 건설 소재는 오래 전 수축사회로 진입했고 자동차 IT도 제로섬으로 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분야는 아직 팽창사회의 영역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혁신성장이 팽창사회를 찾아가는 방법인 셈이다.”

- 왜 세상이 수축하기 시작했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지구촌 인구가 줄어들 게 확실하다. 선진국 인구는 지금이 역사상 고점이다. 중국 인구도 10년 내 줄어든다. 인구 증가를 전제로 설계된 연금 건강보험 생명보험 교육제도 사회인프라 등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인구 감소는 수요 축소를 의미한다. 산업혁명 이후 지속돼 온 소비 중심의 경제 체계가 붕괴되고 있다. 둘째, 과학기술의 발전속도가 너무 빠르다. 과거의 과학기술은 인류를 서서히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지금은 J커브 형태로 발전하면서 공급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중국이 세계경제에 본격 동참한 지 15년 만에 전 세계가 공급과잉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멜더스 이론에 빗대자면, ‘수요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공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셈이다. 특히 AI 도입으로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산층이 무너져 복지 부담은 커지고 소비는 줄어드는 등 양극화가 불가피해졌다. 셋째, 환경오염 방지에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 한국도 연간 100조원 이상 쓰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금을 복지나 경제성장 재원으로 쓴다면 세상은 여전히 팽창할 수 있을 것이다.”

- 리더 그룹의 무능과 오판을 많이 비판했는데.

“위에 든 세가지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우리 삶을 압박하고 있다. 리더들은 이런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제대로 봐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팽창사회적 시각과 방법으로 구조적 변화를 덮으려 하고 있다. 사회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시기에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대책만 남발하는 이유다. 지구촌 리더들의 가장 큰 잘못은 부채를 크게 늘려 구조적 변화를 피하려 한 점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부채를 늘리기 어려워지면서 마땅히 쓸 대안이 사라졌고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쇼비니즘 등 배타적 애국주의가 만연하는 배경이다. 리더 그룹이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고 혁명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모든 영역에서 ‘너 죽고 나 살기’식의 제로섬 무한경쟁이 불가피하다.”

-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많은 어려움을 슬기롭게 헤쳐 나왔다.

“이번에는 다르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와 비교해 보자. 그때는 인구가 계속 늘었고 지구 전체적으로 미개발 지역도 많았다. 주기적인 전쟁으로 생산력을 파괴해 과잉 생산을 막았고 복지 부담도 거의 없었다. 이 시절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세상의 진보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지금 여건은 당시와 완벽하게 다르다.”

- 수축사회가 늦어도 5년 내 본격화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국가와 산업별로 수축사회 진입 속도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국은 5년 뒤 700만 명 이상의 베이비 부머가 60세를 넘긴다. 1ㆍ2차 베이비 부머(1955~74년생)를 합치면 무려 1,500만 명이다. 재정 적자가 본격화하고 가계부채도 더 이상 감당하기 쉽지 않다. 한국경제가 크게 의존하는 중국도 5년 뒤면 고성장이 멈출 것이다. 미중 패권 대결로 자유무역이 쇠퇴하면서 한국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 감소가 빨라지면서 양극화 갈등은 더 첨예해질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한데, 현재의 정치 구도를 보면 비관적이다.”

- 경제 문제에 집중해 보자. 세계 각국이 양적완화로 부채를 크게 늘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팽창사회에서 수축사회로 변하는 분기점으로 평가했다. 왜 부채에 주목하나.

“부채는 무한정 늘릴 수 없다. 언젠가 누군가는 갚아야 한다. 현 부채 수준은 역사상 최고치다. 그리스는 정부 부채로, 중국은 기업 부채로 고민 중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 선진국이 더 이상 부채를 늘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 터지지는 않겠지만 체력(경제력)이 약한 국가부터 서서히 경제와 사회를 옥죌 것이다.”

- 한국도 부채가 많이 늘었지만 아직은 재정건전성이 양호하다는 평가다.

“현재 각국의 경제 정책은 크게 초저금리, 양적완화, 재정투입 등 세 가지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쓸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특히 재정은 매우 건전하다. 당분간 재정 중심으로 경제를 방어해야 한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재정을 시스템 전환비용으로 써야 하는데, 눈 앞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단기 처방에 사용하는 점이다. 우리 가계부채는 1,500조원을 웃돈다. 1년 이자를 4%로 계산하면 60조원이다. 한국이 가계부채를 해결해도 해외에서 부채 문제가 촉발되면 한국도 동시에 터질 것이다. 세상은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가계부채가 문제가 된 상태에서 재정이 악화하면 대안이 없다.”

-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 난타당하고 있다. 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을 소득주도성장으로 몰아가는 데는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는 평가인데.

“경제가 어렵고 양극화가 심하다 보니 다른 나라도 소득주도성장과 유사한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문제는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이 김영란법, 미투운동 등과 결합하면서 국민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경제정책으로 좁게 사용하지만, 사회 구성원들에겐 ‘살아가는 방식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사회문화 정책에 가깝다. 그러니 적응을 못하고 저항도 심한 것이다. 이런 정책을 경직되게 적용할 게 아니라 단계적으로 실시하면서 사회 각 분야가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 정부가 새해 경제정책의 핵심 화두로 ‘경제활력 제고’를 제시했다.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려면 어디에 중점을 둬야 하나.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는 정책은 이제 없다. 그간 부동산이나 SOC를 활용해 경기를 부양하곤 했다. 지금은 모든 산업이 공급과잉이다. 따라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촉발할 분야에 투자하는 게 좋다. 이 때 전제는 점차 인구가 줄고, 저성장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며, 양극화로 복지는 늘어날 것이고, 국가간 경쟁이 훨씬 치열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꼭 필요한 분야에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 수도권 주변부에서 서울 접근을 빠르게 하는 GTX, 대규모 임대주택 건설 등의 투자는 주택문제 해결을 넘어 출산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과거 부실 시공한 도로 교량 지하철 등 위험 시설물을 개ㆍ보수하거나 사회안전시설에 대대적인 투자를 한다면 경제 성장에는 물론 미래 위험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여전히 투자할 곳이 많다.”

- 고용 문제가 심각하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할수록 더 심해질 텐데.

“수축사회에서 일자리 해법은 기본적으로 없다. 유일한 대안은 파이를 늘리는 것, 즉 경제성장률을 구조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에서 더 많은 ‘일’이 만들어지게 해야 한다. 규제 완화라는 수동적 대안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외 기업을 유치하고, 생산비가 더 싸지도록 세금 인프라 등에서 혜택을 줘야 한다. 리쇼어링(해외 진출기업의 국내 복귀)이 가능할 정도로 한국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 그 자체다. 앞으로는 오직 ‘생존’이라는 이데올로기만 존재할 것이다. 좌파정책이든 우파 정책이든, 생존에 필요하면 뭐든지 해야 한다.”

- 조선 철강 IT 자동차 등에 편중된 산업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소재 산업재 IT 자동차가 전체 상장기업 매출의 67%를 점한다. 올해 IT 영업이익이 전체의 절반을 넘을 전망이다. 한국은 지금까지 이런 산업 덕분에 국민소득 3만 달러에 도달했지만, 앞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들 산업 모두 전 세계적으로 공급과잉이고 중국이 가장 많이 투자하는 산업인 탓이다. 정부는 혁신성장에 ‘올인’ 해야 한다. 혁신의 근본인 교육 사회문화 등을 정부와 정치권, 사회 리더 그룹이 해결해 줘야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공유택시 원격진료 등 미래로 향하는 산업에 사회적 관심을 모아야 한다.”

- 최근 택시업계와 카카오택시의 갈등은 기존 산업과 혁신산업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대안은 뭐라고 보나.

“어느 국가나 동일한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원격진료 국민연금 건강보험도 향후 엄청난 갈등 요인이 될 것이다. 마땅한 대안은 없다. 인류 역사상 선제적 대응을 통해 위기를 막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문제가 터지면 그 다음에 해결하려 했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유일한 해법은 ‘겸허함’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기득권을 모두 유지하면서 갈등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 수축사회라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사고와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가진 자가 양보하고 공권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회가 돌아가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게 중요하다.”

인터뷰=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정리=변한나(논설위원실 사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