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의 이름들을 기억하며 새해를 시작한다. 이영자와 김미숙. ‘끝’의 정의를 다시 쓴 이름.
개그우먼 이영자의 한 해는 영광으로 끝났다. 고(故)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의 한 해는 눈물로 저물었다. 이영자는 슈퍼스타, 김미숙은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런데, 둘의 삶은 닮았다.
둘은 제 이름을 갖지 못했다. 이영자의 본명은 이유미다. 조금이라도 더 우습게 보이려고 이름을 바꿨다. ‘유미’와 ‘영자’의 차이만큼, 망가질수록 박수 받는 게 그의 숙명이었다. 김미숙은 ‘용균 엄마’로 살았다. 이름이 지워진 이 땅의 어머니들처럼. 24년간 행복한 이름이었을 용균 엄마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참사로 아들을 잃은 뒤 투사의 이름이 됐다. 그는 ‘투사 용균 엄마’의 운명에 거침없이 올라탔다. 용균의 이름이 헛되이 지워지지 않는 것, 누군가를 살린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 거기에 모든 걸 걸었다.
둘은 차별과 낙인을 견뎠다. 뚱뚱한 여성이 가장 멸시당하는 곳, 방송연예계다. 남성임은 권력이요, 군살 없음은 여성의 의무다. 이영자는 1991년 데뷔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후진 시절이었다. 이영자의 자리는 없었다. 그는 여성 연예인의 생존 전략인 ‘여성다움’을 내던졌다. 자학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웃겼다. 그래서 살아 남았다.
세상은 가난한 이에게 가혹하고, 가난한 유족에겐 끔찍하게 가혹하다. 그들은 ‘적당히’ 슬퍼해야 한다. 아니면 설친다고 욕먹는다. 불순하다고 의심 받거나. “김용균 엄마 뒤에 누가 있지 않겠어요? 못 배운 그 여자가 뭘 알아서…” 며칠 전 만난 택시 기사의 말이다. 아들을 앗아 간 이들과 싸우는 김미숙은 그렇게 ‘유족다움’과도 싸운다. 아들을 비정규직으로 키운 비정규직 엄마임을 자책할 겨를도 없이.
둘은 또한 포기를 몰랐다. 이영자는 어느 날 갑자기 스타가 된 게 아니다. 1980년대 개그맨 공채에 8번 거푸 떨어지고 생계 때문에 유흥업소 밤무대를 뛰었다. 입담이 알려져 특채될 때까지 몇 년을 버텼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그러나 조기 종료됐다. 지방흡입 수술을 한 걸 숨긴 게 들통 나 2003년 방송에서 퇴출됐다. ‘예쁜 스타’도 나이 들면 사라지는 판에, 모두 ‘끝’을 말했다. 그는 다시 일어나 두 번째 전성시대를 열었다. 운이 좋기도 했지만, 깊고 넓어진 사람으로 돌아 온 이유가 컸다. 연말 KBS, MBC 연예대상 2관왕에 오른 이영자의 말은 진짜였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 말은 김미숙의 말이기도 하다. 억울한 죽음들은 절망과 저주로 끝나곤 한다. 김미숙은 그걸 거부했다. 아들의 죽음으로 다른 아이들의 죽음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랐다. 아들 이름을 딴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안의 국회 통과에 매달렸다. “용균이가 숙제를 남겨놓고 갔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대신 해 줄 것을 요구하고 갔다고 생각한다. 남은 자식들은 살려야 한다.” 김미숙은 스스로 커다란 촛불이 됐다.
그리고 둘은 끝내 웃었다. 슬프게 웃었다. “먹다, 먹다, 대상까지 먹게 됐다.”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그렇게 말하며 이영자는 울다 웃었다. 김용균법이 통과된 순간, 김미숙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국회가 왜 법을 더 일찍 처리하지 않았느냐고 가슴 치는 대신 그는 기뻐했다. “용균아, 너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고 엄마가 가서 얘기해 줄게. 아직 미안한 마음 너무 많은데 그래도 엄마 조금이라도 봐 줘…”
이영자는 포기하지 않는 좌절이었다. 그의 작은 승리에 소수자들은 위로 받았다. 김미숙은 행동하는 슬픔이었다. 그의 분투로 밑바닥 노동자들은 ‘죽지 않을 권리’에 눈 떴다. 두 사람을 기억하는 2019년을 보내겠다. “아들에게 조금은 할 말이 생겼다. 그런데 이렇게 끝날까 두렵다.” 김미숙의 말을 잊지 않겠다.
최문선 문화부 순수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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