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한반도 긴장 완화의 새 문이 열렸다면, 2019년에는 본격 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협상 과정의 한 단어, 한 문장은 향후 비핵화와 평화구축의 조건을 규정하는 기반이 된다. 주요 의제들에 대한 구체적 실행 방안과 함께 핵심 개념에 대한 ‘언어의 정치’도 본격화하고 있다.
언어의 정치에서 정의(定義)는 중요하다. 명확한 개념 정의는 외교와 협상에서 승리를 위한최선의 무기다. 정치와 외교의 언어, 그리고 협상의 언어는 유사해 보여도 쓰임새는 상이하다. 대중의 지지와 감동을 얻어야 하는 정치의 언어에 비해, 협상의 언어의 본질은 구체적 조건 조성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개념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언어는 직설적이다. 트위터를 통한 짧은 문장, 언론에 보도되는 언어들은 종종 정제돼 있지 않고, 즉흥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직설적 언어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오랜 기간 사업가로 살며 체득한 협상과 거래의 수단으로써 메시지를 던지고, 복합적인 셈법이 깔린 강한 언어들을 배열해 불가예측성을 높이고 정치에서 우위에 서려고 한다.
북한에 있어 언어는 더 전략적으로 사용된다. 용어의 개념 정의는 생존을 위한 엄중한 조건이자 협상에서 기본적 입장을 취하는 근거가 되어 왔다. 과거 여러 문건과 선언들 중 가장 유리한 용어와 문맥을 활용하는 데 있어 북한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 왔다. 그런 맥락에서 매년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신년사에 담긴 언어와 함의를 분석하는 것이다.
한반도 외교에서 한국의 언어는 정제돼 있고 감동적이다. 가장 광의의 해석을 내리며 상대의 ‘선의(善意)’를 중하게 여긴다. 과거 문안들보다 새로운 문서와 틀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무게를 둔다. 이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러 국내외 주체들에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입장을 반영한다. 이러한 선의에 기반한 수사(修辭)는 상대가 받아 줄 때 큰 의미를 가지지만, 상황이 반전되면 입지가 오히려 좁아지는 위험이 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축에 있어 주요 핵심 개념이 담고 있는 중의적 표현과 해석 방식은 실제 간극을 보인다. ‘종전선언’의 개념은 단순 전쟁 종결 의지 선언부터 군사적 배치 및 주둔의 정당성까지 폭이 다양하다. ‘평화협정’도 평화 정착에 대한 항구적이고 기본적인 방향 설정이라는 해석과 군축 및 주한미군 철수 개념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와 함께 그 조건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낳는다. 이러한 인식 차이 속에서 당사국들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념들을 해석하고 있다.
남북 판문점선언과 북미 싱가포르 합의문은 정치적 선언에 가까워 해석의 여지가 컸다. 광의의 개념 정의는 초반에는 대화의 진척을 빠르게 할 수 있지만, 뒤로 가면서 원하지 않은 상황에 묶일 수 있다. 현재 상황에서 한국이 ‘전략적 모호성’에 기반한 협상을 오래 주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평화와 통일 담론이 국내에 미치는 감동과 선의는 외교 협상 무대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원하지 않는 국민은 없다. 주변적, 기술적 문제가 남북관계의 진전에 장애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 큰 틀의 그림을 그려 가고, 여러 당사자들의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 한국의 역할이지만, 동시에 용어 해석 간의 간극을 좁히고 불확실성을 줄이는 작업도 수반돼야 한다. 외교 공조에서의 걸림돌은 속도와 내용뿐만 아니라 양측이 공유해야 할 주요 개념들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차이에서 발생할 수 있다. 감동의 언어를 던지는 것 뿐만 아니라 용어와 언어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국내 합의와 국제 공조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정의(定義)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재승 고려대 장 모네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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