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규찬(48)은 지난해 '살롱'을 열었다. 홍등을 건 술집이 아닌 그와 동갑내기 지인 두 명과 2~3주에 한 번씩 모여 문화적 잡담을 주고 받는 모임이다. 서울 강남에 있는 조규찬 작업실이 아지트다.
모임의 이름은 '뉴 키즈 온 더 불혹'. 1990년대 미국을 넘어 한국 소녀 팬까지 사로 잡은 아이돌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불혹보단 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지천명ㆍ50)에 가까운 '아빠 부대'의 문화 살롱이라니.
"우리 또래들이 그렇잖아요. 마음은 여전히 스물이고 재미있는 상상도 할 수 있는 데 가장으로 살며 내 안의 어린이는 희미해져가고. 내 안의 어린이를 달래고 싶어 모임을 만들었어요. 같이 창작도 하고요." 지난 크리스마스에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를 찾은 조규찬이 들려준 말이다. 그에게 이 모임은 "일상에 쫓기지 않고 나를 찾을 수 있는 동굴"이기도 하다.
살롱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엄숙함은 모임의 금기다. 뉴키즈 온 더 불혹에서 나눈 추억은 창작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흑백 TV 시절 전파를 탔던 인형극 '부리부리박사' 잡담을 계기로 조규찬은 인형극 주제곡을 편곡해 자신의 공연에서 선보였다. 살롱에서 주고 받은 얘기를 바탕으로 지난달엔 신곡 '운석충돌전야'를 냈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낭만을 가득 품은 목소리에 실린, 종말을 하루 앞둔 밤에 꾼 바람은 아득하게 들린다. 이 곡의 싱글 음반 표지는 붓에 동심이 가득했던 화가 마르크 샤갈 풍의 그림 같은 느낌이다. 미술학도였던 조규찬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조규찬은 지난해 7월부터 소리 소문 없이 매달 신곡을 냈다. 이번 달 7일엔 신곡 '그 날의 온기'를 발표한다. 2010년 9집 '9'를 낸 뒤 무려 8년 만의 신작 행보다. 조규찬은 "이젠 내 음악을 해야겠단 갈증에서 2년 전부터 준비한 일"이라고 했다.
201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조규찬은 3년 뒤 귀국, 대학 강단에서 그리고 윤종신 등이 속한 미스틱엔터테인먼트에서 후배들의 창작을 돕는 데 주력했다. 그 덕에 노래가 드문드문 나오는 가수가 됐지만, 눈 여겨 봐야 할 건 작품 수보다 작품의 다양성이다. 스윙재즈('비 온 날')부터 록('0년 0월 0일')까지. 지난 여름에 발표된 아카펠라곡 '데자뷔’는 견고한 고성 같다. 조규찬이 전자음을 모두 뺀 뒤 육성을 겹겹이 쌓아 울림이 깊다.
조규찬은 1989년 제1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무지개'로 금상을 타 데뷔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어려서부터 작곡을 한 것은 가족 영향이 크다. '열아홉 순정' 등을 만든 작곡가 나화랑(본명 조광환)과 '내고향' '양산도 부기' 등의 곡으로 사랑받은 가수 유성희(본명 유난옥)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라디오로 듣던 폴 모리아 악단의 '이사도라'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부모의 음악적 유산을 물려 받은 조규찬은 1993년 1집 '신스 1993'을 낸 뒤 '추억#1'을 비롯, '믿어지지 않는 얘기' 등을 내놔 사랑 받았다. 두 형인 규천ㆍ규만과 '조트리오'란 이름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2005년 8집 '기타로지’를 낸 뒤 2010년 9집이 나오기까지 5년간 속앓이를 했다. "소속사와 뜻이 달라 앨범 발매가 미뤄진 탓"이었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로 재즈 공부하러 가기 위해 "집 근처 도서관을 한 달 동안 드나들며 중ㆍ고등학생처럼 영어 공부만" 하기도 했다. 따뜻하고 아련한 목소리로 정평이 난 조규찬이지만, 5년 전 MBC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선 1회전 탈락이란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 때 경험을 에세이 '거리에서 문득'에 이렇게 적었다. "내 음악적 표현이 다른 가수와 비교돼 최하위로 평가 받는 건 내 정체성을 군중에게서 부정당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죠. 하지만 방송에서 노래 부를 기회를 얻기 힘든 게 요즘 가수들이죠.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고요."
조규찬은 올해가 음악 활동 30주년이다. 기념 음반을 따로 낼지는 정하지 못했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에 접속하는 시대에 CD를 내야 하나 싶어서다.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그러진 않는다. 이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서 할 법한 나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뭉클한 가족('0년 0월 0일')을 노래하고, "지금 걷는 길이 소중한 걸"('안 해도 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사에 연인들의 풋풋한 사랑을 담으려면, 이제 제겐 지나친 연출이 필요해요. 작위적으로 연출하려기 보다 지금 내가 세상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을 음악에 담으려 하지요.” 조규찬은 엷게 웃었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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