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전 국왕의 차남 알리레자 팔라비(Ali-Reza Pahlavi)가 2011년 1월 4일 권총으로 생을 마쳤다. 향년 44세. 그는 12세이던 1979년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으로 가족과 함께 망명 생활을 시작, 이집트를 거쳐 80년대 초 미국에 정착했다. 이집트에서 암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일가의 후원자였던 당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도 그해 암살당했다. 그들을 받아 준 건 레이건 행정부의 미국이었다.
팔라비 전 국왕은 세속주의자였다. 스위스 등 유럽에서 수학해 영어와 불어에 능통했던 그는 60년대부터 이른바 ‘백색 혁명’, 즉 토지 개혁과 국영기업 민영화, 여성참정권 확대와 히잡 금지, 아동 결혼 금지, 교육 개혁, 문맹 퇴치, 사원 토지 몰수-농민 분배 등 서구식 근대화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동시에 그는 전제군주였다. 반정부인사 특히 국가 세속화에 반발한 이슬람 권력집단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추방했다. 그리고 사치를 일삼은 부패군주였다. 요트와 비행기 조종을 즐겼고, 람보르기니 등 슈퍼카들을 수집하다시피 했다.
1970년대 일련의 오일쇼크와 정치ㆍ경제 불안, 미국에 기댄 개발독재와 이슬람 교권과의 불화 등이 겹쳐 70년대 말 반정부 시위가 격화했다. 암 투병 중이던 그는 가족과 측근들만 데리고 이집트로 망명, 1925년 아버지가 쿠데타로 구축한 팔라비 왕조의 문을 2대 만에 닫았다. 그에겐 2남 2녀가 있었다.
먼저 우울증을 앓던 31세의 막내딸 레일라가 2001년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음독 자살했다. 알리레자의 우울증도 그 무렵 악화했다고 한다. 그는 프린스턴대에서 음악을 전공했고, 컬럼비아대와 하버드대에서 고대이란학(페르시아학)과 고문헌학으로 석ㆍ박사 학위를 땄다. 지인들은 그가 무척 사교적이고 옷을 잘 차려 입는 신사였다고 기억했다. 호메이니의 억압적인 신권정치에 질려 전 왕조 시절의 세속화와 상대적 자유를 애틋해하던 이란인들은 왕가의 잇따른 비극, 특히 알리레자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고 한다. 미혼이던 그는, 당시 사귀던 여성과의 사이에 유복자 딸을 두었다.
명목상의 왕위를 계승한 장남인 레자 팔라비에겐 이런저런 ‘공식’ 역할이 있고, 전 왕비 파라(Farah) 팔라비도 재임 중 벌이던 국제 자선사업을 챙기며 안면을 튼 유럽 왕가들의 결혼식 등 행사에 초대받곤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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