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으로 배럴당 2.9달러의 원유값이 이듬해 1월 11.6달러로 두 달 새 4배가 됐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반발로 중동 국가들은 대미 원유수출을 중단했다. 전 세계 물가가 치솟고 경기가 침체했고, 당연히 성장률도 곤두박질쳤다. 1차 오일쇼크였다.
미국 닉슨 행정부는 2차대전 이후 처음 연방 차원의 고속도로 속도규제법(National Maximum Speed Law)을 제정했다. ‘경제속도’를 유지해 연료 소비를 줄이자는 것. 골자는 4차선 이상 고속도로의 경우 최고 시속 55마일(90km)을 넘지 못한다는 거였다. 일요일에는 휘발유 판매를 금지했고, 장식 조명도 일체 못 켜게 했다. 당국은 하루 평균 20만 배럴, 즉 73년 대비 약 2.2%의 소비 감축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속도 규제는 연방이 아닌 주정부 권한이었다. 전시와 맞먹는 비상사태이긴 했지만, 반발한 주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광활한 서부의 주들, 캘리포니아, 몬태나, 미주리 등이 거부했다. 연방정부는 주간 고속도로 유지보수 지원금을 교부하지 않겠다며 각 주를 압박했다.
중동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미국 원유금수조치는 이듬해 3월 해제됐지만 속도규제법은 95년 말까지 유지됐다. 반발이 심해지자 미 의회는 87년 제한속도를 시속 65마일(105km)로 완화했다. 벌금과 구류, 면허정지 등 처벌규정에도 불구하고 법을 준수한 이들도 드물어 82년 뉴욕주간고속도로 조사 결과 위반율이 무려 83%에 달하기도 했다. 98년 미 교통위원회는 법 시행으로 석유 소비는 0.2~1% 줄었다고 밝혔다.
당시 한국도 석유값을 비롯 거의 모든 생필품 가격이 25% 가량 급등했다. 석유류의 경우 시도별 ‘에너지대책본부’가 물량을 할당ㆍ통제, 겨울 난방용 등유를 사는 것조차 힘들었다. 외국인과 허가 받은 소수 특권층을 제외한 시민들의 고급승용차(8기통 이상) 운행이 금지됐고, 모든 승용차의 공휴일 운행이 통제됐다. 각급 학교의 겨울 방학이 길어졌고, 관공서의 난방도 규제를 받았다. 서울의 경우 73년 5만4,000여 대였던 승용차는 이듬해 말 4만 4,000여 대로 줄었다. 군사정권의 위기대응 ‘능력’이 그러했다. 이제 정치ㆍ경제적 위기 때문이 아니라 기후 환경 때문에 에너지 대책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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