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아내와 저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맞벌이지만 ‘쇼윈도 부부’입니다. 밖으로 잘 놀러 다니고 즐거워 보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서로 말도 잘 안하고 다투기만 합니다. 이렇게 생활한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진정 행복한 부부관계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내와 결혼한 것은 아내의 순수함이 좋았고, 이 여자라면 함께 살면서 적어도 믿고 신뢰할 수 있고, 내가 가진 무한한 에너지로 아내를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그런 따뜻함을 아내에게 갈구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밤새 영화도 같이 보고, 소소하게는 라면도 끓여 먹고, 그냥 내달려서 아침 해돋이도 보고 싶어요. 그런데 아내에게는 통하지 않는 일입니다. 저녁 10시 이후에는 먹으면 안되고, 숙소 없이 어디론가 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밤새우는 것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죠. 뭔가 자신만의 신념과 관리가 철저하지만 저에게는 무미건조함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아내와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집에 오면 아내는 반겨주긴커녕 화난 모습입니다. 대화를 하자고 하면 본인은 원래 말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 번 말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며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도 부담이 된다고 하네요.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여지없이 옛날의 폭언이나 폭력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흥분해 언성이 높아지면 아내는 차분하고 점잖게 소리를 낮추라 합니다. 약 올리는 것 같아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악순환이 반복되죠. 아내가 하는 얘기들은 마치 취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치 잘못한 것처럼 의기소침해지고 그러면서 소리를 지르게 되고 아내를 억누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내에게 인정받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직장에서 고속 승진했을 때도 아내는 “급여는 얼마나 올라? 별로 안 오르네, 아무튼 축하해”라는 반응이었어요. 저는 ‘와 우리 남편 멋있네,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저녁 보내자’라는 걸 기대했는데 말이죠.
저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장남이었어요. 제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발로 차서 폭행하는 장면을 본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제 부모님과 달리 항상 단란하고 따뜻한 가정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제 말을 잘 들어주지 않으면 아버지가 하던 방식대로 폭언을 하고 심지어 폭행을 하기도 했어요. 잘못했다는 것을 알지만 사막같이 무미건조한 아내를 보면 이내 감정이 욱합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아이도 있고, 아내도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기에 우리 부부가 노력해 모범적인 부부의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내, 아이와 함께 있으면 나만 혼자인 듯 외롭고, 앞으로 남은 생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 고민스럽습니다.
신호진(가명ㆍ45ㆍ회사원)
호진씨, 저는 먼저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이 원하는 결혼은 어떤 결혼이었나요. 아마도 당신은 부부가 알콩달콩하고, 다정다감하고, 아기자기하게 사는 결혼 생활을 기대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결혼 생활이 좋은 결혼이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결혼 생활이 그렇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아요. 아마도 저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묻기 위해서, 혹은 행복해질 수 있는지 궁금해서인 것 같아요.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돌아봐야 해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굉장히 정서적인 사람이에요. 감정이 풍부하고, 상대와 감정을 많이 주고 받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느낄 거에요. 일상 생활에서도 많은 사람들과 웃고, 얘기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고, 그러면서 에너지를 얻고 힘을 내는 스타일일 거에요. 반면에 가까운 사람과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따뜻하게 감정을 주고받지 않으면 삶이 무미건조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지요.
대화와 긍정적 감정교류가 행복한 결혼생활의 기준이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원래 타고난 당신의 성향이 그럴 수 있고요, 두 번째는 어린 시절 부모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지켜보면서 다짐을 했겠지요. ‘절대로 이런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당신은 놓치고 있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은 어린 시절에 부모의 부정적 감정 표출에 많이 노출돼 있었다는 것이지요. 화를 내고, 분노하고, 우는 등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겪었지요.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은 부정적이고 공격적 감정이 극대화된 표현 형태인 반면에 어머니의 침묵과 순종은 부정적 감정이 수동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이지요. 어린 호진이는 본인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아버지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감정공격과 어머니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감정공격 사이에서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고 불행했을까요? 가까운 사람 간의 침묵이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그런데 호진씨, 부정적인 감정에 많이 노출되면 커서도 부정적인 감정이 유발되는 상황을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요. 기쁘고, 즐거운 긍정적인 감정들에는 대처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불편한 감정이 생기고, 이 감정이 불쾌함이나 불행으로 쉽게 이어지고 이 감정이 바로 화로 바뀌게 되고 분노의 폭발이나 폭력으로 표현되기도 하지요. 호진씨는 감정이 풍부하고 감정교류가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감정이 잘 조절이 안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마 당신은 아내와의 대화에서 거절, 냉담함, 침묵이 불러 일으키는 분노를 잘 다루어 내는 데는 취약한 것 같습니다. 당신은 그런 모습에서 아버지를 닮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겠지만, 당신은 아버지와 다르고, 다른 삶에 대한 염원과 기대가 큰 사람이에요. 실제로 다정다감할 것이고, 상대를 위로하고 곧잘 농담도 하는 사람일 거에요.
당신의 아내는 당신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것 같아요. 감정을 지나치게 잘 통제하고, 말수가 적고, 전문적이고, 이성적이지요. 아마 당신은 그런 아내에게 이끌렸을 것 같아요. 그러나 끌렸던 그 점 때문에 결혼생활이 힘들기도 한 것이지요. 아내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사람이에요. 마지막에 합리적인 결정과 결과가 중요하지, 중간 과정에서의 감정은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어요. 아파서 징징거리면 투정을 받아주기보다 ‘투정한다고 덜 아픈 것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말을 안 하거나 냉정하게 말하겠지요.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아내에게 당신은 어떤 배우자일까요. 아마 자신에게 과하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아내는 당신이 불필요한 것을 얘기하고, 해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할 거에요.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폭언하고, 폭행도 했지요. 아내는 그녀의 특성상 당신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어려울 거에요. 당신이 대화하자고 하면 또 폭행을 할 것 같아 두려울 거에요.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때문에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호진씨의 모습이 늘 아른거릴 거에요. 그래서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를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일하랴 아이 키우랴 힘들어 죽겠는데 남편은 다 큰 어른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고 뭘 같이 하지고 하니까 요구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내도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을 거에요.
호진씨, 당신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은 무리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예요. 그리고 정반대의 사람들이니 맞추기 어려울 거에요. 그러나 아이가 있으니 이혼은 신중하게 마지막에 고려해야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저에게 먼저 도움을 청한 것처럼 당신이 먼저 아내에게 손을 내밀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아내와 잘 지내고 싶다면 서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말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완전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슷한 성향을 가진 부부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그걸 깨닫고, 노력하면서 살아갑니다. 서로를 고치려고 하면 관계가 절대로 나아지지 않고, 상대가 바뀔 가능성도 없습니다.
이상적인 결혼 생활은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이 가진 어릴 때부터 다짐해왔던 결혼의 기준을 바꾸지 않으면 계속 우울할 수밖에 없어요.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 당신은 아내에게 또 요구를 하고, 그러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화를 내고, 서로가 다시 멀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겁니다. 아내도 그런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아내가 당신이 가진 인간적 미숙함과 실수를 인정하고, 폭력을 용서해줘야 관계가 나아갈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자신의 특성을 잘 이해한 뒤에 노력해야 해요. 예를 들어 당신이 ‘눈도 오는데 겨울 바다 보러 가자’고 하면 아내는 자연스럽게 ‘추워 죽겠는데, 무슨 겨울 바다야’라고 반응하겠지요. 이건 고칠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해요. 다만 그 다음에 당신은 ‘생각해보니 당신 말도 맞네, 바다 가면 정말 추울 거야’라고 말하도록 애써야 해요. 물론 아내 역시 ‘추워도 재미있을 수 있겠네. 그래도 당신이 가자고 하면 생각해볼게’라고 말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대화가 순조롭진 않을 거에요. 다른 사람들 이야기나, 뉴스 등으로 가볍게 시작하는 것도 좋아요. 드라마 주인공에 대한 생각도 주고 받고요. 대화가 어렵다면 편지를 쓰는 것도 아내와의 관계 회복에 도움이 될 거에요. 길지 않고 짧게요. ‘나는 이런 감정이 중요한 사람인데, 내가 충족되지 못한 부분을 당신에게 과도하게 요구했어. 화를 잘 통제하지 못해 폭력을 행사한 것은 진심으로 미안해. 나에게는 없는 당신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면은 높게 평가하지만, 나의 이런 부분들과는 다른 것 같다’는 내용 정도로요.
아이를 중심으로 감정을 나누는 것도 좋아요. 아이의 행동이나 취향 등에 대해 부부가 함께 대화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먼저 감정을 나누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어야 부부의 성관계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겁니다. 성관계는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지, 일방적으로 누군가가 요구해서 들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니깐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를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