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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세상을 납작하게 만드는 냉소주의

입력
2018.12.28 19:30
수정
2019.01.15 15:53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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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이 경계한 ‘순진한 냉소주의’

어쩌면 지금 언론의 모습 아닐까

새해엔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길

다독과는 거리가 먼데, 올해 제법 많은 책을 읽었다. 혁명(‘촛불’을 그리 부른다면) 뒤에 더 짙은 환멸을 앓듯 어지러운 시대에, 지천명은커녕 무언가 안다고 말하기가 점점 더 두려워지는 나이에, ‘미디어전략’이란 난감한 업무를 들고 버둥대다 보니, 혹여 아둔한 머리를 깨워줄지 모를 누군가의 경험과 지식을 맹렬히 탐하는 일에 매달리게 됐다.

그렇게 쌓인 책더미에서 ‘인생 책’ 딱 한 권을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들겠다. 작가이자 환경ㆍ인권운동 활동가인 리베카 솔닛이 트럼프의 등장 이후 더 깊어지고 거칠어진 미국사회 갈등의 속살을 파헤친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명명(命名)의 힘’이다. “모든 것을 그 정확한 이름으로 부를 때”에야, “숨겨져 있던 잔혹함이나 부패를 세상에 드러내”고,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격려하고 희망과 전망을 불어넣는 대화를 독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기도 한 #미투 운동, 기후변화, 국가폭력, 젠트리피케이션 등에 얽힌 불편한 진실들이 ‘여덟 지옥’ 순례하듯 펼쳐지지만, 책장을 덮을 즈음엔 마지막 문장처럼 “희망을 현실로 바꿔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눈길을 두게 된다.

희망이라고? 언제부턴가 ‘고문’이란 흉측한 말과 짝패로 호명될 만큼 남루해진 그 희망 말인가? 거친 반박이 나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솔닛에게 희망이란 모든 것이 잘되리라 가정하는 낙천주의가 아니다. “내게 희망이란 늘 미래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뜻했다.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어쩌면 스스로 미래를 써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희망은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믿는 것, 미래가 아직 씌어지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빛나는 문장들이 그저 뛰어난 글솜씨가 아니라 “모든 것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의 열매임을 새삼 깨닫는다.

머리를 깨우고 가슴을 흔드는 문장들에 진하게 밑줄을 긋다 문득 떠올린 이름이 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이자 반올림 대표 황상기씨다. 힘겨운 공론화, 지루한 협상, 오랜 노숙농성 끝에 지난달 미흡하나마 피해 배상 등 중재안에 합의하고 삼성의 공식 사과를 받아냈다. 그가 모는 택시 안에서 딸을 떠나 보낸 지 4,280일 만이다. 2012년 속초 집에서 그를 만났다. 정말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 혼자 싸움으로 시작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들어가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이겨요. 절대 지면 안 돼요.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일하며 잘살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해요.” 재벌과의 싸움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미 겪어 알지만 다른 미래를 기어코 만들어낸 그야말로 솔닛이 말한 ‘희망’의 상징 아닐까. 나는 ‘올해의 인물’로 그를 꼽고 싶다.

묵은 기사를 꺼내 읽으며 나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는 뒤늦은 자책 탓만이 아니다. 정말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신 운운하는 저 질문에 웅크린 한 움큼의 냉소가 세월을 넘어 훅 끼쳐 왔기 때문이다. 억울한 죽음과 승리를 기약할 수 없는 싸움, 속절없는 패배를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지켜보면서, 기자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세상이 다 그렇지, 뭐” 따위 냉소에 몸을 적셔온 것은 아니었을까.

“순진한 냉소주의가 걱정스러운 것은 그것이 과거와 미래를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공공의 삶과 공공의 담론에 참여할 동기는 물론이거니와 지적인 대화에 참여할 동기마저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솔닛의 말을 빌리자면, 지적인 대화를 독려하는 것이 바로 언론의 사명 중 하나일 터. 현실은 어떤가. ‘암울한 확신’이라는 중화기를 동원한 ‘전쟁 같은 대화’를 부추기며 과거와 미래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비판’과 ‘냉소’를 자주 헷갈리며 희망을 질식시켜 왔을지 모르는 우리, 새해에는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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