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할 줄 아는 건 인간이 지닌 위대한 특성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보다 나아질 10년 후를 기약하며 월급쟁이들은 매달 빠듯한 돈을 쪼개 적금을 붓는다. 통쾌한 어퍼컷으로 적수를 때려눕힐 그날을 꿈꾸며 복서는 매일 몇 시간씩 반복되는 달리기와 근력운동과 샌드백 치기를 감수한다.

레슬링을 기막히게 잘하던 아테네 청년 테세우스가 불멸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것 역시, 다른 희생자들과 달리 치밀한 생환계획을 들고 ‘라비린토스’ 미로 속으로 뛰어든 덕분이다. 사실 문제는 미노타우로스의 괴력이 아니었다. 이 미로의 진짜 악몽은 설계자인 다이달로스조차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러니 설령 테세우스가 반인반수의 괴물을 해치운다 한들, 살아나올 방법은 없었다. 테세우스를 연모한 아리아드네와 설계자 다이달로스가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단 하나의 방법이 저 유명한 실타래였다. 감옥 입구에 실의 한 끝을 묶어두고 타래를 풀며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다음, 그 실을 따라 왔던 길을 되짚어 나오는 것.

‘삶을 계획하고 그 계획 아래 움직이는 사람은 극도로 복잡한 미로 같은 세상에서 자신을 안내할 한 올의 실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반면 무계획의 충동으로 움직이는 인생은 머잖아 무질서의 지배 아래 놓이고 만다.’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경구를 읽을 때마다 그리스 신화 속 테세우스가 떠오른다. 어쩌면 위고 역시 라비린토스를 우리 인생에 은유해 이 명언을 남긴 것이리라.

어릴 적 학기 종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가 제일 먼저 하던 일이 ‘방학 생활계획표’ 짜기였다. 컴퍼스에 연필을 끼우고는 도화지 위에 한 바퀴 빙 돌려 원을 그리는 일은 늘 설렜다. 이제부터 한 달 넘는 시간을 내 의지대로 쓸 수 있다는 자부심에 차올라 손이 아플 만큼 연필을 꽉 쥐곤 했다. 지우개로 몇 번을 지웠다 그리며 시간을 배분해봐야 잠자기, 식사, 공부, 독서, 놀기처럼 빤한 목록으로 채워졌지만 말이다. 동그라미 일일계획표 아래, 참으로 내키지 않으나 꼭 지켜야 할 목록을 습관처럼 작게 메모했다. 일기는 매일 쓰기, 바로 위 언니와는 절대 싸우지 말기(싸워봐야 지니까), 투덜거리지 말고 요강 깨끗하게 닦기… 초저녁 겨울추위 속에서 다섯 개나 되는 요강을 일일이 닦는 일은 늘 고역이었다. 그 옛날 시골집 방마다 놓였던 놋 요강, 사기 요강, 스테인리스 요강들은 다 어디로 갔나. 습관의 힘은 참으로 세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매년 이맘때 새해 계획을 세운 뒤 친구 몇 명이 모여 서로 독려하는 작업을 꽤 오래 했다. 그러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약속에 대한 피로가 쌓인 30대 후반부터 흐지부지됐지만.

연말이면 수십 개씩 쌓이던 탁상달력과 다이어리 숫자가 올해 많이 줄었다. 불경기의 여파라고 한다. 제일 예쁜 수첩을 골라서 간만에 새해 ‘위시리스트’를 작성하기로 한 나는, 오래 전 수첩들을 꺼내 맨 앞에 써넣은 그때의 계획들을 살폈다. 인생은 장기전이라더니, 여전히 이루지 못한 십수 년 전의 다짐들을 참고해 새해 목표 리스트를 채워나갔다. 더러 지금은 생경한 내용도 보였다. ‘엥겔계수 30 이하로 낮추기.’ 퍽이나 싸돌아다니며 처마시던 그 시절의 흔적은 다행히 지금 내 삶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급적) 욕하지 말자.’ 비겁한 알리바이까지 괄호 안으로 묶어가며 무얼 그리 욕하고 싶었던 걸까. 웃으며 넘어가려는 찰나, 수첩을 훔쳐보던 동료가 불쑥 말했다. “와! 이거, 미션 임파서블인데요. 그나저나 욕 안 나오는 세상이 오기나 할지.” 가만 생각하다가 테세우스의 실타래를 움켜쥔 심정이 된 나는 조금 덜 비겁한 열 번째 위시리스트를 수첩에 적었다. ‘(가능한 한) 욕 덜 나오는 세상을 만들어보세!’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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