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감 느끼며 젊은 여성에 성적 인정 욕구 커져
“젠더 감수성 키우지 않으면 파멸에 이르는 시대”
모 기업 임원인 최모(50)씨는 올 가을 여성 직원들을 상대로 한 행사에 참석해 나름 분위기를 띄우려고 인사말을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여성들이 많아 기분이 좋다. 마치 꽃밭에 서 있는 기분이다. 정말 예쁜 꽃들이 많다”는 그의 인사말이 문제가 된 것이다.
행사에 참석했던 일부 여직원들은 행사가 끝난 후 여성을 ‘꽃’에 비유한 최씨의 발언을 비판하며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최씨는 속으론 억울하다 생각했지만 하는 수 없이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을 뿐 여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며 공개사과를 했다.
여성가족부 성희롱 실태조사(2016년)에 따르면 성희롱 행위자 중 40대 이상 연령층의 비율은 73.8%로 압도적이다. 인생의 정점에 서 있는 이들이 성희롱을 저지르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다른 성별의 입장이나 사상 등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 즉 ’젠더 감수성‘의 부족을 꼽는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여성을 의도적으로 학대하거나 무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감수성 자체가 없어 그들이 행한 여성과 관련된 발언이나 행동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말실수(?)에서 끝나면 다행. 직장 내 권력(위계)을 이용해 주도면밀하게 여성 직원에게 접근하는 경우도 많다.
◇한밤중 여직원에게 “뭐해” “만나자” 카톡
처음은 업무적인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다른 직원과 할 수 있는 업무도 자신이 마음 속에 둔 여직원과 하고, 야근 후 격려차원이라는 핑계로 밥이나 술을 사는 빈도도 늘어난다.
천정아(법무법인 소헌) 변호사는 “이 단계까지는 여성이 남성이 의도적,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혹 인식을 하더라도 상사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참고 넘어 간다”고 말했다.
업무를 핑계로 접근하는 데 성공하면 개인적 관심을 대 놓고 드러낸다. 천 변호사는 “한밤중에 여직원에게 카카오톡 등 메신저로 ’모해(뭐하니)?, 보자‘ 등의 내용을 보냈다면 이미 선을 넘은 것”이라며 “이들은 여성이 성희롱이라고 신고를 하면 ‘선배로서 후배를 아끼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라고 발뺌한다”고 말했다. 천 변호사는 “성희롱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일정기간 자신과 여직원이 나눈 카톡 내용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삭제하도록 한 상사도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에는 자신의 행동이 성희롱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을 했지만, 최근에는 성희롱인 줄 알기에 증거를 조작하거나 없애려는 ‘지능범’까지 등장한 것이다. 천 변호사는 “유부남의 경우 ‘업무의 연장선일 뿐 피해여성을 여자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은데, 낮은 처벌을 받기 위한 변명”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공허감 느끼는 ‘사추기’의 일탈
이동귀 교수는 “50대가 되면 ‘사추기(思秋期)’를 겪는 남성이 늘어나는데, 이들은 가정에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불만을 다른 여성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피해여성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라며 “궁지에 몰리면 ‘너도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 나를 받아준 것 아니냐’고 적반하장 격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서정석 건국대충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중년이 되면 삶에 대해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데 증세가 악화되어 성적으로 인정 받으려 하는 경우가 있다”며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경우 자신에게 대응할 힘이 약한 젊은 여성에게 집착을 보인다”고 말했다. 올해 한국사회를 흔든 ‘미투(#Me Too)’운동으로 재판에 넘겨진 유력 대권 후보와 연극계 최고 권위자의 추락 등이 대표적 사례다. 서 교수는 “남성이 한밤중에 보낸 카톡에 반응을 하거나, 밥이나 술을 사준다고 할 때 따라 나서면 망상에 빠진 남성들은 상대 여성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며 “여성은 직장 내 관계를 고려해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하나 고민하겠지만, 가능한 한 분명히 ‘NO’라는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동귀 교수는 “여성도 적극적으로 자기방어에 나서야겠지만 결국은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을 끌어 올려야 한다”며 “지금도 ‘나는 문제없다’며 힘없는 여성을 교묘하게 괴롭히고 있는 남성들이 많은데, 과거와 달리 대오각성을 하지 않으면 파멸에 이를 수 있는 시대”라고 경고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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