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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언제부터 ‘극혐’했나

입력
2019.01.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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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3차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혐오발언 금지라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 11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3차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혐오발언 금지라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한국일보 자료사진

미움의 감정이 극에 달했다.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의미의 ‘혐오(嫌惡)’로는 부족한지, 그조차 더할 수 없을 정도라며 ‘극(極)’을 앞에 붙인다. 대상은 다양하다. 특정 종교인이나 난민, 다른 세대와 젠더(genderㆍ성)를 향하고 가까운 지인을 비난할 때도 쓰인다.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한 갈등만큼이나 미워하는 감정은 만연하다. 그야말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혐오 시대다.

 언제부터 극혐이 생겼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 ‘극혐’은 감탄사이자 일상어가 되어버렸다. “OO이는 정말 극혐이야” ‘극혐주의’와 같이 쓰이는가 하면, 단지 어이가 없거나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습관적으로 ‘극혐’을 외친다. 어린이들이 혐오를 입에 올리는 풍경도 쉽게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언제부터 혐오의 감정으로 휩싸였을까.

2004년부터 현재까지 구글 검색어를 분석한 구글 트렌드(Google trend)에 따르면 온라인에서 ‘극혐’이란 단어가 처음 검색된 시기는 2012년 2월이다. 사용자들이 검색창에 ‘극혐’을 써넣고 결과물을 찾기 시작한 때이니, 어휘의 쓰임은 그보다 앞선다. 2012년과 2013년 검색 빈도는 비교적 낮은 수준을 유지했지만 2014년부터는 극혐의 쓰임이 급격히 늘었다.

혐오하는 감정은 특정 갈등상황에 단연 두드러졌다. 2014년 1월 16일 고려대학교에 붙은 대자보 “‘김치녀’로 호명되는 당신, 정말로 안녕들 하십니까?”에는 “여성 혐오가 보편적인 세상”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극혐 검색 빈도는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언론에서 ‘극혐’에 앞서 ‘여성 혐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건 2015년의 일이다. ‘소비사회와 청년세대의 여성혐오(최영지, 2017)’를 주제로 한 논문에서는 여성 혐오가 언론에 등장한 첫 사례로 2015년 1월 당시 18세 소년이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인 이슬람국가(IS)에 합류한 사건 보도를 꼽았다. 보도에는 “김군은 인터넷을 통해 일부 10~20대 남성에서 나타나는 여성 혐오적 성향이나 폭력적이며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쌓아왔던 것으로 보인다”는 표현이 담겼다. 구글 검색으로 드러난 ‘극혐’ 관심도(1~100)는 이때 처음 50을 넘어서며 정점을 찍었다. 지금까지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임계점 넘은 혐오현상 

국립국어원은 2015년 3월 극혐의 동사형인 ‘극혐오하다’를 ‘2014년 신어’로 선정했다. 2013년 7월~2014년 6월 언론에서 많이 사용된 신어에 포함된 것이다. 극혐은 물론 그동안 익명성에 기대 온라인에서 표출됐던 OO남, OO녀, OO충 등 특정 집단의 성향을 일반화해 싸잡아 비난하는 표현은 어느새 입으로 소리 내 말하는 일상어가 됐다. 누군가 좀 진지하면 “너 진지충이야?”하고 묻는다. 굳이 비난할 의도가 없어도 상대를 벌레라 부르는데 망설임이 없다. ‘나 같은 정서를 가진 사람이 보편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는 혐오 정서에 노출된 경험이 임계점을 넘고 있다”며 “모든 전염은 임계점을 넘어가면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 위험한 신호다”라고 우려했다.

일상의 언어는 젊은이들의 사회적 관계와 삶이 어떤지 설명해준다. 사회 현상이나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 언어화하고, 자주 쓰이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해 감정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국립국어원 이유원 학예연구사는 “신어는 언어의 경제성이나 사회성을 바탕으로 하여 개인의 표현 욕구나 사회상을 반영하여 만들어진다”며 “요즘 쓰이는 이른바 ‘혐오 표현’은 대상에 대한 공격성이 높아지면서 차별하고 비난하고 싶은 개인의 욕구나 사회의 갈등 양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표현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대상을 지나치게 공격하거나 혐오를 조장하는 표현이 남용돼 이것이 언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공격적 행동이나 사회 갈등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려스럽습니다.”

 정치를 통해 공급된 혐오 

언어생활의 영향보다 더욱 본질적인 원인은 바로 ‘공급된 혐오’다. 장덕진 교수는 정치를 통해 집단에 대한 혐오가 공급된다고 지적했다. “정치집단 간 갈등이 있을 때, 상대 정당의 정책으로 혜택을 보는 집단을 혐오하는 방식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진보정권이 소득주도성장 등 분배지향적 정책을 제시하면, 보수 야당은 정면 논쟁을 하는 대신 혜택을 볼 서민층에 대해 ‘게으르고 무임승차하려는 집단’이라고 혐오를 퍼뜨리는 식입니다. 보수집단뿐 아니라 진보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백인우월주의 단체 ‘큐클럭스클랜(KKK)’ 같은 인종혐오 집단이나 나치 등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는 방식이죠.”

혐오를 반복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는 미디어 환경 탓도 크다. 유튜브 등 1인 미디어가 늘고 온ㆍ오프라인 언론사가 수천 곳에 달하면서 거름 장치 없이 무분별한 확산이 가능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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