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해가 갈수록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에 깊이 절감을 하게 됩니다. 특히 마음에 입은 상처는 좀처럼 치유가 어려워,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옷을 여며 입고 숲 산책을 나갔습니다. 한 주 전 만해도 의연한 나무들의 겨울나기가 대견해 보였는데, 오늘은 제 마음 탓인지 비로소 나무들의 상처가 보이더군요.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잣나무였습니다. 잣나무도 곧게 자라는 나무지만 자라다가 가지가 둘로 갈라져 버린 나무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이 나무들은 오래전 줄기의 끝이 부러졌던 흔적입니다. 아마도 잣송이를 따기 위해, 나무에 오르다 부러트린 사람의 탓이 클 것입니다. 줄기 끝에 키를 키우던 눈(芽)이 사라지자, 양옆에 있던 눈들이 깨어나 위기를 대처하느라 만들어진 모습이지요. 잣나무는 씩씩하게 자라고 있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상처의 흔적은 세월이 흘러도 선명하네요.
상처 많은 줄기로는 참나무들이 단연 많습니다. 우리나라 하늘소 종류의 25%가 참나무를 기주식물로 삼아 수피 틈새에 알을 낳고, 애벌레는 나무를 파 먹으며 나무 깊이 들어가 성충이 되기까지 자라지요. 나무줄기에 뻥뻥 뚫린 구멍이 이들의 탈출공입니다. 물론 적은 나무좀의 탈출공 등등 다양하지요. 울퉁불퉁 혹처럼 생겨난 모습은 도토리를 많이 떨어뜨리느라 줄기를 돌로 찧어 생겨난 상처가 아문 흔적이기도 합니다.
나무들은 작은 상처들은 스스로 치유합니다. 상처를 입으면 흔히 캘러스(callus)라고 부르는 유합조직이 생겨 봉합합니다. 동일한 식물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인 조직배양도 식물의 이러한 특성을 발전시킨 것이지요.
소나무의 송진도 상처를 치유하고 방어하는 물질입니다. 해를 입으면 송진이 흘러나와 곤충과 병원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합니다. 하지만 이 송진은 소나무의 치유를 위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용도가 다양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한 가해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비행기 연료로 쓰기 위해 송진 채취가 대대적으로 강요되어 소나무와 국민들을 힘들게 했던 일은 유명합니다. 소나무 줄기에 브이자(V) 형으로 패인 상처가 그 흔적입니다.
스스로 치유하지 못한 나무들은 약해져 병해충의 침입이 더 쉬워집니다. 나무에 분해자 버섯들이 피어있으면 나무의 건강은 나쁜 것입니다.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 같은 귀한 나무들은 나무 의사들이 치료하는데, 외과수술을 하곤 합니다. 부패해가는 죽은 조직과 병해충을 드러내고 살균하고 차단하는 작업이지요. 그 부분의 나무는 새로 자라게 하진 못합니다.
상처를 치유했던 나무들은 그 흔적을 안고 평생 살아갑니다. 때론 그 상처가 약한 곳이 되어 다른 상처를 입기도 하지요. 사람도 나무도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고 살지만 버텨내고 극복할 수 있는 만큼이어야 합니다. 겨울 숲길 산책의 시작은 제 상처의 치유를 위한 일이었으나 마지막 발걸음에선 한 해 동안 의도하지 않았으나, 혹은 인지하지조차 못한 채 말하고 행동하여 다른 이들에게 주었을 상처들에게 마음이 갔습니다. 부디 그 상처들에 캘러스가 형성되어 새살이 돋고 송진이 덮여 깊은 상처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새해엔 좀 더 사려 깊고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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