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0년차 뮤지컬 배우 신영숙
‘엘리자벳’서 황후 엘리자벳 역할
“신영숙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요즘 뮤지컬 마니아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뮤지컬 배우들 역시 나이를 거스르기 어렵다. 자신의 나이에 따라 배역을 맡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조연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배우 신영숙(43)은 다르다. 지난달 17일 막을 올린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주인공 엘리자벳을 연기하며 열여섯 소녀 시절 모습까지 소화해낸다.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예전 신영숙은 무대에서 조숙함을 넘어 성숙했다. 20대 때부터 수많은 ‘부인’ 역할을 거쳤다. 팬들 사이에서 애칭이 ‘신여사’일 정도다. 10대부터 60대까지의 황후 엘리자벳을 혼자서 아우르며 관객의 갈채를 받고 있는 신영숙의 연기력은 이런 이력과 무관치 않다. ‘엘리자벳’이 공연 중인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인근에서 최근 만난 신영숙은 “대본에 있는 지문이 신영숙을 만든다고도 한다”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 같은 지문이 부담스럽지만 내가 나를 믿어야 관객들도 나를 믿는 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서고 있다”고 말했다.
신영숙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1999년 뮤지컬 ‘명성황후’의 작은 역할인 손탁과 앙상블을 맡아 뮤지컬계에 발을 디뎠다. 그는 “서서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인물이 되어 무대에서 걷는 연기를 경험하면서 ‘이게 내 길이다’라는 확신이 왔다”고 말했다. 2000~2007년에는 서울예술단에서 활동했다.
어느덧 데뷔 20년을 맞았다. 신영숙은 그동안 크고 작은 배역을 수 없이 소화했다.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2년 연속(2017ㆍ2018년) 여우조연상도 받았다. ‘팬텀’의 카를로타 부인과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이 그에게 상을 안겼다. 올해 초연된 뮤지컬 ‘웃는 남자’에서는 팜므 파탈인 조시아나로 변신했고, 스스로 “꿈의 배역”이라고 말했던 ‘엘리자벳’으로 거듭났다.
‘엘리자벳’은 신영숙에게 유난히 특별하다. 주인공으로서 3시간짜리 극을 이끌어 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엘리자벳이 시어머니인 대공비 소피와의 갈등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부르는 대표 넘버 ‘나는 나만의 것’은 높은 고음을 소화해내는 가창력은 물론 심경의 변화까지 담아내야 하는 곡이다. 이 노래를 한국에 처음 소개했던 배우가 신영숙이었다. 아직 ‘엘리자벳’이 한국에서 초연(2012)되기 전, 그는 아이돌그룹 JYJ 출신 배우 김준수의 뮤지컬 콘서트(2010) 무대에 올라 ‘나는 나만의 것’을 한국 관객에게 들려줬다. 이때부터 그의 팬들은 신영숙의 ‘엘리자벳’ 출연을 원했다. 신영숙은 자신의 첫 ‘엘리자벳’ 공연이 끝난 후, 공연장 로비에서 팬들과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30~40명의 팬들과 같이 엉엉 울었어요. 그동안 저를 계속 지켜봐 온 팬들과 같이 무대에 올라간 느낌이었거든요. 저보다 팬들이 더 긴장하고 공연을 본 것 같아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엘리자벳’의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73)는 이번에 한국을 찾았다가 신영숙의 공연을 보기 위해 비행기 일정까지 바꿨다고 한다. 신영숙은 “클래식함이 바탕이 된 르베이의 음악이 저와 잘 맞는다. 음악에 자신감이 있으니까 연기에 더 몰입할 수 있다”며 웃었다.
앙상블에서 완벽한 주연이 되기까지, 노래와 연기력은 당연히 갖춰야 할 자질. 신영숙에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20년간 단 한 번도 공연을 펑크낸 적이 없다. 지금도 공연 전이면 무대 위에 올라가 혼자서라도 전체 곡을 불러본다. 신영숙은 “배우로서 신영숙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배역과 다양한 장르에 대한 도전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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