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만 되면 맡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새해 달력을 달라는 분들이 몰려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네요.” 서울 목동의 한 시중은행 지점에 근무하는 박모(30) 계장의 하소연입니다.
1년간 사용했던 달력을 새 달력으로 바꾸는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흔한 모습 중 하나입니다. 최근엔 스마트폰 달력 기능을 이용해 날짜를 확인하거나 일정을 관리하면서 종이 달력 사용이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달력을 찾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은행입니다. 최근 경기 불황에 기업들이 달력 제작 부수를 줄이면서 시중에서 공짜 달력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데다 ‘은행 달력을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도 있는지라 연말이면 달력을 구하려는 중장년층의 은행 방문이 부쩍 늘어납니다.
지점에서 근무하는 은행원들이 골머리를 앓는 것도 이즈음입니다. “지점에 가면 달력을 받을 수 있냐”는 문의 전화가 하루 수십 통씩 오는 건 애교 수준. 거래 고객이 아닌데도 지나가는 길에 들려 “달력 3부를 달라”고 하거나, 전날 달력을 받아간 걸 뻔히 아는데도 또다시 들려 “못 받았다”며 재차 요구하는 경우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벌어지다 보니 업무에 지장이 있다는 호소도 이어집니다.
사실 은행 입장에서 달력은 마케팅 효자입니다. 고객의 집이나 사무실, 식당 등에 은행 로고가 들어간 달력이 한 번 걸리면 1년 내내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은행들이 해마다 달력을 300만~500만부씩 찍던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달력을 얼마나 많이 배포하느냐가 영업력의 척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연말이면 말단 행원들이 달력을 한아름 들고 나가 주택과 상가 곳곳을 누비며 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은행의 달력 인쇄부수가 당시의 60~70% 수준으로 줄어든 데다 지점별로 할당된 달력 수도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예전처럼 달력을 달라는 대로 무작정 주기도 난감하다는 게 현장의 고민입니다. 어떤 고객에게 달력을 배포하느냐에 대한 공식 지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점 입장에선 아무래도 주거래 고객이나 기업에게 ‘서비스’ 하려는 계산이 앞서기 마련이죠. 이렇다 보니 해당 지점에서 통장을 개설한 사실을 인증 받거나 금융상품에 새로 가입한 고객에 한해 달력을 제공하는 원칙을 정한 지점들도 생기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렇다 해도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냐” “돈도 많이 벌면서 그깟 달력 하나에 인심 야박하다”고 언성을 높이는 고객들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경기 안양시의 시중은행 지점에 근무하는 김모(30) 계장은 “지점 입장에선 정작 거래하는 고객을 못 챙기면 손해인데 거래 고객도 아닌 분들의 성화로 배부 이틀 만에 달력이 동났다”며 “’은행 달력은 공짜’라는 인식이 여전히 팽배해 내년에도 시달릴 게 불 보듯 뻔하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4대 시중은행(KB국민 신한 우리 KEB하나)이 제작한 내년도 달력은 총 762만3,000부로 올해(755만5,000부)보다 0.8%가량 늘어났습니다. 증가율은 낮은 편이지만 달력 제작부수를 전년보다 2~5%가량 줄였던 올해와 비교하면 대조적입니다. 은행 달력을 찾는 고객들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발동해서일까요, 아니면 사상 최고 수준의 실적을 거둔 덕에 은행 인심이 후해졌기 때문일까요.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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